Page 154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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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 내리겠다. 원임 각신 가운데 좌상이 써서 올리도록 분부하라. 경기
감영에서 장계로 청한 조목은 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회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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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을 수축할 때 부족한 비용은 경기 감영에서 지불했다. 독산성을 수축할 때 토신(土
神)에게 고유한 전례에 따라 수원부사 이경무를 초헌관으로 삼고, 독산성 중군 이한흥을 차헌관
으로 삼았다. 제사 지낼 때의 제물은 전례보다 새끼 양 한 마리를 더하고 밥과 떡은 세 가지로
정하여 격을 높였다. 제문은 내각 지제교가 지어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이번에는 정조
자신이 직접 지어서 내렸다. 독성산성을 완공한 후 고유제를 지낼 때 올린 비문은 정조가 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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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것으로 좌의정 채제공이 써서 올린 것이다.
3-4. 독산성에서의 무예수련
독산성에서의 군사훈련은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되었다. 체찰사 유성룡이 훈련도감을 통해 활
을 쏘는 사수(射手), 총을 쏘는 포수(砲手), 창검을 다루는 살수(殺手)의 삼수군을 양성할 때부
터 독산성에서도 삼수군을 육성하는 군사훈련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조정에서 독산성에 시
험관을 파견하여 무과를 열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독산성은 “실로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군병이 있는 곳”으로 주목을 받았다.
1603년 2월에 비변사가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를 통해 독산성을 모범으로 남한산성이 관리되고
있으며, 특히 둔전을 모범적으로 운영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산성의 형세에 대해서
본사(本司: 비변사)에도 익히 살펴본 사람이 있습니다. 둘러싸인 가운데에 완연히 한 도읍이 이
루어졌는데, 산굽이가 몹시 깊어 바깥에서 굽어보거나 엿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옛날에 백제가
이곳을 국도로 삼은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다 성을 쌓은 다음 한결같이 독성(禿城)에서처럼 군
사를 조련하여 안으로는 경도(京都: 서울)의 보장이 되고 바깥으로는 여러 부대[鎭] 함께 통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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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한다면 참으로 장구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인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수원부는 호(戶)마다 대오에 편입하여 마을에서는 병사가 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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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여긴다.”는 보고서이다.” 물론 이 중심에 독산성이 있었다. 이처럼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20) 일성록 정조 16년 7월 8일
21) 일성록 정조 16년 10월 3일
22) 선조실록 159권, 선조 36년 2월 18일 을사 1603년
23) 인조실록 1636년 9월 13일
152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