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9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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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독산성의 개축과 관리
3-1. 독산성, 상무의 공간이자 효의 성지
창덕궁은 1997년에 화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의 개혁정치의 바탕이 된
수원 화성 역시 아름답고 견고하여 18세기 성곽의 백미로 손꼽히는 공간이다. 지난 201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역시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춘 난공불락의 산성이다. 이처
럼 세 곳 모두 정조의 지시로 수리되거나 축성된 곳이다. 또 한 곳 정조가 각별하게 관리했던 공
간이 있다. 바로 세마대가 있는 독산성이다.
18세기 초, 만주족이 건설한 청나라는 세계 최강이었다. 한족이 세운 명나라보다 훨씬 강력하
고 영토도 두 배 이상 확장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사도세자가 북벌을 공공연히 거론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의 한 원인에는 ‘북벌’이라는 금기를 건드린 사실
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1760년 여름,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으로 가던 중에 독산성에 올랐다. 이때 사도세자는 독산
성에서 호종하는 신하에게 효종이 묻히려 했던 자리가 어딘지를 물어 수원부 관아를 찾고 화산
을 올랐다. 다시 독산성에 돌아온 사도세자는 무예를 사열하고 활을 쏘았으며 운주당에서 하룻
밤을 지냈다. 이보다 앞서 1750년에는 영조가 독산성에 올라 임진왜란을 회상하고 군기를 점검
했던 일이 있다. 이처럼 독산성은 삼남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데다 임란 때의 전승지로 알려진
요새였기에 역대 왕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였다.
“우리 숙조(肅祖:숙종)·영고(英考:영조)께서 효모(孝廟:효종)의 지사(志事)를 뒤따르고 중화
(中華)의 멸망을 개탄하여 모든 계술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으신 것이 없으니, 이것은 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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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嗣:정조 본인)가 본받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는 숙종과 영조도 효종의 북벌정책을 계승했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도 효종을 따를 것임
을 다짐했다. 이러한 정조의 발언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정조
는 효종을 본받으려 노력했던 사도세자의 상무적 기질을 드러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일대기
12)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9일 경신 1779년
독산성에 깃든 부국강병의 꿈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