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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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군제개혁은 시대적 요청



                        국가지도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어느 시
                      대에나 필요한 일이다. 정조는 자신의 시대를 ‘경장(更張)의 시대’로 파악했다. 경장을 요즘말로
                      바꾸면 개혁(改革)이다. 창업(創業)의 혼란스런 시기가 지나면 평화롭고 안정된 수성(守成)의 시

                      대가 한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보면 창업기의 신선함과 활력은 사라지기 마련이
                      다. 오래된 거문고의 느슨해진 줄을 조이고 낡은 줄은 갈아 끼워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조율
                      해야할 경장의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조선은 개국 200년이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을 겪으

                      며 국가체계 전반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무렵 정치권의 주역
                      으로 등장한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고 대립하면서 대책마련은 이루어지지 않았

                      다. 그 결과 왜란이 끝난 지 채 30년도 되지 않아 다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연거푸 겪어야
                      하는 고난이 이어졌다. 이처럼 양란 이후 조선은 곳곳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선조에게는 조선
                      을 건국하면서 세운 법과 제도 전반을 경장해야할 막중한 책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다. 효종시대(1649~1659)에 양반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
                      쓰며 시작한 대동법(大同法)이나 영조시대(1724~1776)에 실시된 균역법(均役法)은 이러한 시대
                      적 요청에 부응한 결과물이다.



                      1-3. 오위제의 복원



                        영조와 정조가 재위했던 18세기는 시급한 변화가 요구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정치권은 노론
                      과 소론,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군대의 사정도 정치권과 다를 바 없었

                      다. 임란 당시에 임시로 설치된 훈련도감이 200년 동안 핵심군영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인조
                      반정 이후에 창설된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 같은 군영과 숙종시대에 창설된 금위영까지 다섯
                      개의 중앙 군영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훈련 방식은 물론 지휘체계조차 통일되지 않았

                      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이 5군영을 운영하는 경비로 지출되고 있다는 사실
                      이다. 군역(軍役)에 관한 부담은 고스란히 일반 백성들의 몫이었다. ‘백골징포’로 상징되는 군역

                      비리가 백성들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었다.
                        세손시절부터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고 있던 정조는 1778년에 ‘대고(大誥)’를 선포했다. 정조의
                      국정운영 철학이 담긴 대고는 제민산(制民産, 백성의 살림살이를 제정함), 성인재(成人材, 인재

                      를 성취시킴), 힐융정(詰戎政, 군정을 다스림), 유재용(裕財用, 재정을 풍족히 함)을 목표로 내




                      142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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