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6 - 오산문화총서 3집
P. 146
“성곽과 주택, 수레와 기물은 어느 것 하나 그에 합당한 규격과 제작법이 없을 수 없다. 규격
과 제작법을 제대로 갖추면 견고하고 완전하여 오래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만든 것이 저녁이면 벌써 못쓰게 되어 백성과 국가에 끼치는 폐해가 적지 않다.” 7)
농학(農學)을 가학(家學)으로 정립했던 성명응의 학문은 영의정을 지낸 아우 서명선, 아들 서
호수와 서형수를 거쳐 손자 서유구에게 이어져 <임원경제지>로 집대성되었다. 풍석 서유구
(1764~1845)는 화성을 설계한 다산 정약용(1762~1836)과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
다. 남한산성의 대대적인 보수가 소론계 실학자 서명응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눈여
겨 볼만하다. 훗날 화성을 건설할 때 남인계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고 거중기를 제작하는
등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과도 비교되는 일이다.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 아래 광주부윤 이명중(李明中, 1712~1789)이 공사를 총감독했다. 3월
에 시작한 공사는 6월 18일에 완료되었다. 이명중은 노론계의 인물인데 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이유(李濡)이고, 장인도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金在魯)이다. 이명중은 남한산성을 개축한
공으로 충청감사로 특배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명예직인 돈녕부와 의금부의 동
8)
지사의 자리에 올랐다. 남한산성 보수공사를 끝낸 서명응은 정조의 명을 받아 남한산성에 관
련한 <남한지(南韓誌)>를 편찬했다. 서명응이 남한산성 개축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남성신수기
(南城新修記)’는 감독을 맡았던 이명중이 수어장대 앞에 서 있는 병암에 새겼다. 또한 같은 내용
이 1846년에 수어사였던 홍경모의 <중정남한지>에도 실려 있다.
개축 공사가 완공되고 석 달이 지난 8월에 여주의 영릉을 방문하는 7박8일 간의 능행에서도
대부분의 중요한 행사를 수어사 서명응이 주관했다. 영릉 참배를 마친 후 남한산성에서 4박5일
동안 이어진 야간군사훈련인 야조와 승군들의 진법훈련, 무과시험을 주관하고, 성곽의 순시도
서명응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때 정조는 남한산성을 둘러보면서 병자호란 당시 산성에서 벌
어진 전투와 승패의 원인을 꼼꼼하게 진단했다. 남한산성이 가진 지리(地利)의 이점을 살려 적
을 방어하려면 인화(人和)가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7) 박제가, <북학의>, 안대회 옮김, 돌베개, 2003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명사전
144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