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2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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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1,000냥으로 우선 공사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17)
독산성의 둘레가 1,004보인데 이 중에서 완전히 새로 쌓은 부분이 732보, 보수한 부분이 272
보이다. 이때 7할 이상을 새로 쌓은 것이다. 수문(水門) 세 곳도 모두 개축하였고, 성가퀴도 309
보를 새롭게 쌓았다. 지휘소인 남장대(南將臺)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3척(尺)을 뒤로 옮겨 다시
세웠다. 공사 보고를 받은 정조가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산성은 중요한 요해지이고 원침(園寢: 현륭원)에서 가깝다. 또 경진년(1760)에 사도세자가
머물러 숙박하였던 곳이며 장대(將臺)는 바로 진남루(鎭南樓)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곳이다.
지금 수리를 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 내려야겠다. 원임 각신들 중에서 적임자를 좌상(左相: 채
제공)이 써서 올리도록 하라.”
독산성을 새로 쌓고 보수할 때 책임자로 활약한 사람은 수원부사 이경무이다. 이경무는 정조
가 즉위한 뒤에 여사대장을 시작으로 경기수사, 금군별장, 삼도수군통제사, 어영대장, 포도대장
을 거쳐 금위대장, 포도대장,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두루 역임했던 핵심 무관이다. 1788년에 정
조가 북영에 주둔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하며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던 적이
있으나 곧 풀려나 1791년에 여주목사에 특보되었고, 1792년에 수원부사에 임명되어 재직하던
중에 독산성을 보수하는 실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원부사로 재직하면서 정조의 돈독한 신임
을 받은 이경무는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어영대장, 훈련대장, 금위대장, 한성부
판윤, 포도대장을 두루 지냈다.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난 탓에 독산성은 1792년에 완전히 새롭게 단장되었다. 화성 성역이 시
작되기 2년 전의 일이다. 독산성의 보수공사에 남한산성을 개축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일
부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독성산성의 수축에 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
만 전해질 뿐이다.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에도 이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지만
내용은 간략하고 중복되는 것이다. 남한산성을 보수했던 내용이 <중정남한지>에 실려 있고, 화
성을 축성한 사실은 <화성성역의궤>로 출판되었다.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화성성역의궤
>는 그 충실한 내용과 깔끔한 편집으로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75년부터 시작된
18)
화성 복원공사 때에도 이 책이 유용하게 활용되었던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이러한 사례에
17) 일성록 정조16년 7월 10일
18) 2017년 11월 17일에 수원문화원 대강당에서 열린 ‘수원 화성 세계문화유산 등재 발자취를 찾아서’란 포럼에서 당시 수원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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