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5 - 오산문화총서 3집
P. 155
에 수원의 사람들은 병사가 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상무적 기풍이 형성되어 있
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 강화도에서는 서원과 향교에 서검재(書劍齋)를 설치하고 공부하는 유
생을 모두 모아서 대오에 편입시키고 ‘교생군’이라 불렀다. 서검재를 창안한 이원익은 유생들에
게도 창검을 다루는 무예를 가르쳤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독산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원지역의 상무적 기
풍은 병자호란 때도 지속되었다. 김준룡 장군이 지휘한 광교산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에 승리를
거두었던 사실도 이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수원을 ‘무향(武鄕)’이라 부르게 된 배경이다.
정조가 화성에 장용영 외영을 설치하면서 상무의 바람이 불었다. 독산성에 주둔하는 군사들
은 본부 군사들에 밀리지 않으려 더욱 열심히 무예를 연마했다. 독산성에 소속된 각종 군관과
군보(軍保)는 2,123명이다. 원래 2,439명이 있었는데 정조가 이 가운데 아동으로 구성된 별무
24)
사 316명을 해체하도록 지시하여 실재 병력이 2,123명이다. 규정대로 스스로의 실력을 연마
하는 사습(私習)을 날마다 실시하되 첫날과 마지막 날은 연병장에서 하는 규정과 똑같이 연습하
도록 했다. 무예의 실력을 시험하여 시상하는 중일(中日)에는 <무예도보통지>에 의거하여 무예
를 가르치고 시험 보이도록 하였다. 번(근무)을 서기 시작하여 제 11일째 되는 날에는 활쏘기 시
험[試射]과 조총 사격시험[試放]을 실시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군사들에게 상을 내렸다. 조총
사격연습을 할 때 필요한 화약과 탄환은 본부에서 지급해 주었다. 사습을 할 때나 무예 시험을
준비할 때 1초(哨: 120명 내외)마다 각각 진법(陣法) 교사 1명과 기예(技藝) 교사1명을 배정하여
군사들을 가르쳐 완전하게 기예를 익히도록 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3-5. 화성 건설의 주역
정조는 화성을 축성하기 훨씬 전부터 성곽에 대한 연구를 깊이 했다. 남한산성과 독산성을 찾
아 성곽의 견고함이나 시설물들을 직접 살펴보았다. 여기에 더해 정조는 팔도 군현의 수령들에
게 관할 지역에 있는 산성을 그려 바치도록 지시하는 한편, 1792년에는 정약용에게 성제를 지
어 바칠 것을 명했다. 고향에서 부친의 삼년상을 치루고 있던 정약용은 유성룡의 <징비록>을 살
펴보고, <무비지>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서적을 통해 성곽 제도를 살펴 화성을 설계했다. 이
24) 일성록 정조22년 10월 19일
독산성에 깃든 부국강병의 꿈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