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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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돌을 돌리거나 구덩이 형태를 취하며 일반적으로 집자리 중앙부에 위치한다. 패총, 즉 조
개더미 유적은 남해안에서는 덧무늬토기 단계에, 서해안에서는 빗살무늬토기 단계에 등장하지
만, 그 수가 급증하는 것은 후기에 들어서다. 서해안 패총 대부분과 일부 남해안 패총은 소규모
로서 거의 전적으로 굴 껍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물도 극히 드물다. 이러한 유적은 정주 마을
과는 그 기능적 성격이 다른 유적으로서, 소위 한정행위장소 혹은 일시적 거주 지점이라 부를
수 있는 단기 사용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남해안 패총은 규모도 크며,
패각층에는 각종 유물과 사슴이나 멧돼지, 어류를 비롯한 동물 유체가 다량 포함되어 있고 때로
는 집자리와 무덤, 야외 화덕도 발견되고 있어,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사용된 생활 근거지
로서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신석기인들은 주로 채집과 수렵·어로를 통해 생계를 해결했으며, 농경의 비중은 높지 않았
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육지에서는 도토리·가래·밤과 같은 나무 열매나 풀뿌리 등을 채집
하였으며, 멧돼지·사슴·고라니·야생비둘기·까마귀·독수리 등 다양한 종류의 짐승들과 새
들을 잡아 먹었고, 강이나 바다에서는 굴·소라와 같은 조개를 비롯하여 각종 물고기, 심지어
복어나 고래, 상어도 식용되었다. 이 시대의 농경활동의 증거는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조와
기장과 같은 탄화곡물(炭化穀物), 그리고 밭을 가는 굴지구(掘地具)인 보습이나 수확구인 낫 등
의 발굴조사 양상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부산 동삼동 패총의 기원전 5,000년 경의 덧
무늬토기 표면에서 기장의 압흔(壓痕)이 검출되어 농경의 시작을 더 올려 볼 수 있게 되었다. 또
한 2012년도에 고성 문암리유적에서는 기원전 3,0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이랑과 고랑을 갖춘
밭이 발굴되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신석기시대 밭이어서 매우 중요하다. 다만
문암리에서 발굴된 밭의 경우는 신석기시대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어서 논쟁의 대상이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인접 지역과 교류한 증거도 드러나고 있다. 남해안에서는 일
본의 죠몽토기와 흑요석이 나왔고, 반대로 일본의 큐슈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결합식낚시바늘,
그리고 조개팔찌 등 남해안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물건들이 확인되었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양 지역의 교류에는 배가 이용되었을 것인데, 창녕 비봉리유적이나 울진 죽변리유적에서 발굴
된 것과 같은 통나무로 만든 배와 노가 그것을 증명한다. 두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5,700년 경에 해당한다. 이 밖에 전국적으로 확인되는 흑요석이나 결상이식(玦狀耳
飾)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와도 교류했음을 보여주고 있
으며, 한편으론 사람들의 이동 경로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석기시대의 예술품이나 치레걸이로서, 울산 신암리유적에서는 여성을 상징하는 토우(土偶)
가, 양양 오산리유적에서는 흙으로 빚은 사람 얼굴 조각품이 나왔으며, 부산 동삼동이나 창녕
고고학으로 본 선사시대의 오산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