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7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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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의원 개념이네요. 그분들이 모여서 중요한                 ▲ 그 당시 학교는?
                       결정도 하도 운영방식은 지금의 농협과 비슷하                  - 그때는 오산에 성호국민학교하고 광성국민

                       네요.                                       학교, 삼미국민학교 3밖에 없었어요. 역사가
                       - 그렇지요. 숫자만 다르지만 거의 그 당시 이                성호, 삼미, 광성 순서지. 그리고 사변 후에 오
                       동조합이나 세마농협, 단위조합에서 대의원                    산초등학교가 생기고

                       식으로 하고 해서 비슷하지요. 그것도 그 당시
                       군 지부에서 지시한 거지요.                           ▲ 그 당시 중학교는 오산중학교 다녔나요?
                                                                 - 처음에는 없었고 그 후에 사변 후에 생겼지,

                       ▲ 조합장님은 원래 세교1리가 고향이시고 군대                 오산중학교 1기생들이 흙벽돌 뽑은 사람들이
                       다녀오셔서 이동조합 할 때는 세교1리 이장을 하                에요. 흙벽돌 뽑아서 학교 지은 거라니까 중학

                       셨고 1970년도에 와서 오산농협으로 통합되고                 교 1기생들이.
                       나서 2대 조합장을 하신 건가요?
                       - 이기정 씨가 13년을 했어요. 그러고 내가 2번              ▲ 그러면 그 당시는 중학교를 수원으로 갔나?

                       한 거지요. 3년씩, 그때는 임기가 3년이었거든                - 학교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 돈도 없
                                                                 고, 그때 광성학교 졸업하면 그만이었지. 중

                       ▲ 올해 연세가 87세 인가요?                         학교, 고등학교 그때는 중학교가 6년제였는데
                       - 호적상으로는 2살이 줄어서 1936년생이야.                별로 가는 사람도 없었어. 돈도 없지만, 학교
                       옛날에는 보통 2∼3살 줄이는 건 보통이지. 홍                도 멀고 해서

                       역 마마가 있어서 싹쓸이하다시피 하거든. 그
                       때 사람들은 2∼3살 주는 건 보통이었어.                   ▲ 독산성 세마대 팔각정은 언제 지은 건가요?
                                                                 - 사변 후에 지은 거지, 서랑리 유희훈 씨가

                       ▲ 이동조합 처음 할 때 조합원들은 농사짓던 분                문화원장할 때 지었는데, 유엔초전기념비 전
                       들이네요.                                     에 몇 년도인지 기억이 안 나네. 유희훈 씨가
                       - 그때 대부분이 다 농사지                           서랑리 유완재 아버지 그분이 화성문화원장

                                                                 할 때 지은 건데…. 그분이 화성문화원장 하
                       ▲ 그때만 하더라도 풍족하진 않았지요?                     면서 세마대 처음에 도로 길 닦고 하면서 고생

                       - 어려웠지요. 조 석 끼니가 안 되고 어려웠지                많이 했어요. 그 이후에 초전기념 이쪽에 조그
                       요. 그 당시에 아침은 밥에 저녁 죽 먹으면 잘                맣게 쌓은 기념비도 유희훈씨가 했는데…. 이
                       지낸 사람들이에요. 50년대, 60년대 보릿고개                름이 적혀 있을 텐데 유희훈이라고.

                       가 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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