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7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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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  역은  주읍(군현)과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

                  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실제로  역과  주읍  거리가  너무  멀거나  역  사이의  거리가
                  고르지  못한  경우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을  옮기거나  합병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같은  행정구역내에서만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주읍을  바꾸어  이속시키는  경우
                  도  있었다.  오산(수원)의  청호역이  대표적인  예인데,  원래  수원부에  속하였던  청호
                  역은  세종  6년(1424)  날로  황폐해지는  진위현을  되살린다는  명목하에  진위현으로

                  이속되었다.  비록  14년만인  세종  20년(1438)에  다시  수원도호부로  되돌아왔지만
                  이후로도  재이동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의  역로는  고려시
                  대와  마찬가지로  역도-속역체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수  개  내지  수십여  개의  역을  한  데  묶어  역도로  편성한  다음
                  역승이나  찰방(察訪)의  지휘  감독  아래  순행하며  관리하였다.  고려시대의  역도가  조
                  선시대에  이르러  언제쯤  완전  개편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분적인  개편

                  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태종  때  이루어졌으며,  세종  때에는  전국적인  규
                  모의  역로망을  새로이  조직하였다.  세조  때도  3번에  걸친  개편이  있었는데,  세조  3
                  년(1457)에  있은  1차  개편은  주로  기존의  역도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2차(세조  6
                  년)와  3차(세조  8년)  개편은  역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여  재편성하는  데  목적이  있

                  었다.  이때  수원에는  청호역,  장족역,  동화역이  있게  되었다.  이  3역은  양재도에  속
                  하였는데,  청호역은  수원도호부의  동쪽  25리에  있었으며,  장족역은  부의  동쪽  30
                  리,  동화역은  부의  서쪽  7리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수원에는  이밖에도  오산원(烏山院),  사원(蛇院),  대제원(大梯院)  등의  3개의  원이  설
                  치되어  있었다.  이중  오산원(烏山院)은  오산지역에  있던  원이다.
                    『경국대전』에서는  전국의  역을  그  규모라든가  중요도에  따라서  대로,  중로,  소로

                  로  구분하는데,  경기도에  대로와  중로가  집중된  것은  무엇보다  교통량이  많았기  때
                  문이다.  당시  수원도호부의  청호역은  중로에  속하였으며,  장족역과  동화역은  소로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의  중앙역은  병조(兵曺),  승여사(乘輿司)의  지휘  감독을  받았으
                  며,  지방의  역도는  찰방이나  역승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이미  고려  말부터  나타나

                  는  역승은  서울의  크고  작은  관아에서  10년  동안  복무한  뒤  퇴직하는  서리  가운데
                  채용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임명되었다.  품계는  동반  9품이었다.  이들에게는  더  이
                  상의  승진은  허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기도  15개월  정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대개  역로를  돌보기보다  사리사욕을  쫓는데  치중하는  폐단이  있었다  한다.
                  더욱이  역로를  이용하는  관리  등으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은  사정으
                  로  결국  역로쳬계가  문란해지자  일찍부터  종6품  벼슬의  찰방이  파견되어  중요  역도

                  를  관할하였다.  중종  30년(1535)에  이르러서는  그동안의  관리폐단을  거듭하여온  역
                  승제를  완전  철폐하고  찰방제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찰방의  임기는  3년이었으나
                  임기를  채우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찰방의  근무  성적은  관찰사가  평가하였으
                  며,  상벌  역시  관찰사의  소관이었다.  찰방은  녹봉을  받지는  못하는  외직이었으나  관

                  직  서열상  현감보다  높았던  데다가  경직(京織)으로의  승진  사례가  비교적  많았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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