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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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문음이나 공신자제의 지원이 많았다. 그러나 중앙 관료가 찰방으로 나가는 경우
는 드물었고, 각 도(道)에 배치된 도사 등의 관료가 겸직하거나 말단의 무관이 파견
되어 점차 지위의 하락을 가져왔다. 조선 후기 정조시대에 설치된 수원의 영화역에
서는 북성외척후장이 찰방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각 역에는 역리(驛吏)를 두어 실무
를 담당케 하였다. 역리는 우리, 참리라고도 하는데, 양인 신분으로서 세습되는 것
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반역죄를 짓거나 향리로서 죄를 지은 자도 역리로 전락되었
다. 그런 만큼 역리의 새로운 진입은 금지되었으며, 실질적으로 노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다. 역리 가운데 성실하고 글을 아는 자를 선정하여 역장으로
삼아 역호를 통솔케 하였으며, 그 밑에 역부장을 두어 업무를 돕게 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수원지방의 역참은 대부분 조선전기의 역참이 그대로 존속되어
운영되었다. 다만 역참의 크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조선후기 영조 대에
편찬된『여지도서』수원부읍지에 의하면, 동화역은 수원부의 서쪽 10리에 위치하여
대마 1필, 복마 4필, 역노 8명 정도가 배치되어 역참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장족
역은 부의 북쪽 25리에 있으며 대마 1필, 기마 2필, 복마 2필, 역노 5명, 그리고
오산의 청호역은 수원부의 동남쪽 25리에 위치하며 대마 2필, 복마 3필, 역노 7명
의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후기 수원지방의 역참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의 하나는 영화역의 신설이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양재역
이 정조 20년 8월 29일에 수원 화성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이전, 설치하고 영화
역으로 새롭게 개칭했다. 원래 양재역은 종6품의 찰방이 근무하는 중심 역으로 12
개의 속역을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 역로상의 중심에 해당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그
리고 이 양재역은 삼남대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관물, 진상의 운송은 물론 사신들의
왕래에 따른 접대와 영송, 그리고 숙박편의 제공 등으로 인하여 관리운영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던 곳이기도 하다. 경기도에는 6개 본역이 설치되어 찰방(종6품)을
두었는데 수원은 영화도(迎華道)에 속했다. 수원에는 본 역 말고 자체로 소역이 3곳
이 있었다.
조선시대말기 수원지역 육로발달과 일제 초에는 경부선 개통으로 수원과 병점, 오
산에 근대식 기차역이 생기고 뒤이어 농수산물을 원활히 수송할 수 있는 협궤열차
(인천, 수원, 여주)까지 개통되었으며, 일제 말 오산에 비행장이 신설되어 항공로까
지 확보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오산은 보기 드문 교통발전의 고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역촌이라 하면 잘 몰라도 역말이라 하면 우리 오산지역에 지명이
있어 잘 알 것이다. 역말이란 옛날 파발역이 있던 마을을 가리키며 역말에는 꼭 3
개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역삼동이라 한다. 역삼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첫째는 상마을인데 이곳에는 관아가 있었다. 둘째 중마을에는 마굿간이 있었던 곳
이다. 커다란 사료창고가 있었다. 셋째 하마을에는 노비들의 생활터전으로서 이곳에
가면 아주 쓸쓸했다 한다. 그리고 역말의 공통점은 물이 흔해야 하므로 하천을 끼
고 있거나 여의치 못하면 저수지를 설치해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비교적 이 세 마
을은 부락이 평평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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