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4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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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70명과 오산지역병 50명이 습격하였고, 또 그날 밤에 의병이 다시 모여 접전하였는데 의
병 7명이 죽었고, 당월 1일에 일본군 1소대는 수원으로부터 급히 갔다하고...
<참고자료>
당시 약6개월 전「東京朝日新聞」1896년 3월 31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수원의 위
급… 경기도 안성, 장호원, 평택, 충청도 온양, 목천 등지에서 봉기했던 폭도는 그 세를 오미장에 집중해
광주, 즉 남한산성의 적도와 기맥을 통해 상합하여 장차 수원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있다. 이보다 먼저 강
화도의 지방병 200여명은 수원에 와서 그 방비에 임하고 있으나… 수일 전 수원은 이미 적수에 함락됐
다는 소문이 있다.” 이 기사의 오미장은 현재의 오산장(오매장터)을 의미한다. 또 오산지역의 의병활동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계속되며 오산지역에서 의병들의 활동은 드높았는데, 의병활동 중 큰 사건만을
살펴본다면, 1907년의 오산역습격사건, 1908년 3월 원동 일본인 마을을 습격하여 일본인 살해 등, 1909년
문시면의 의병장 안춘경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한매일신보 제184호 1908년 1월 12일. 잡보.
<수원군수의 보고>
수원 청호면 오산리 사립 명진학교는 지역 시민들이 협의하여 설립하였는데, 학도가 날마다
더하여 매우 빠르게 진전될 전망이 있으나 경비가 넉넉지 못 한고로 당해 지역 장시에서 소를
매매하였는데, 매필의 이십 전씩만 수합하여 학교에 보용하겠다고 시민 박성배 등이 군수에게
청원한고로 군수가 학부에 보고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제348호 1908년 8월 1일. 잡보.
<철도파괴>
그저께 밤에 비가 와서 수원, 오산의 정거장, 철로 다리가 끊어져서 경부차가 그저께부터 통
행치 못한다하더라.
조선총독부관보 1911년 10월 27일.
<조선총독부고시 제321호>
명칭 : 오산학교조합 설치인가
지구 : 경기도 수원군 청호면 오산동
232 김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