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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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부의 治所를 현재의 수원시 팔달산 동쪽 기슭으로 옮겨가게 하였던 것이다. 한편, 1793년
                        (정조 17)에는 수원부를 留守府로 승격시키고 이듬해부터는 華城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화성축

                        성은 단순한 읍성으로서 공격·방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園寢과 華城行宮을 수호하고 수원유
                        수부가 신흥대도회로 발전할 수 있는 행정적·군사적 거점으로, 나아가 정조의 강력한 왕권강
                        화의 상징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1895년(고정 32)에 근대식 행정제도로서 지방제도를 개정, 23部制를 시행하여 유수
                        부를 폐지하고 수원군으로 개칭하면서 일시 仁川部 관할로 된 적이 있었으며, 그 이듬해 13道
                        制로 다시 바뀌면서 경기도 수원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서 수원군

                        은 남양군을 통합하였는데 이때 오산시 지역은 淸湖面의 湖자를 따서 城湖面이 되었다.
                         이처럼 오산지역은 조선시대 수원지역과 함께 정치·군사·행정·교통의 중심지로 활용되

                        었으며,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도 매우 풍부한 편이다. 세교지구 발굴조사를 통해서도 조
                        선시대 유적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이러한 조선시대 오산지역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생활유구는 주거지·수혈유구·건물지·야외노지·구상유구·석렬유구·우물지
                        등 매우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1지구 9·10지점에서 67기의 주거지와 주변에 다수의
                        수혈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2지구 13지점에서도 57기의 주거지와 수혈유구 등이 확인되

                        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생활유구의 분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 밖에
                        분묘 주변으로 주거지가 산발적으로 분포하는 예도 확인되고 있는데, 이는 임시주거 공산으로
                        써 활용된 예로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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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6> 조선시대 주거지 ①2지구 2지점 1호 ②2지구 3지점 1호
                         분묘는 대부분 토광묘를 사용하였으며, 일부 회곽묘도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구릉 정상부에



                                                                 오산 세교택지개발 지구 내 유적 발굴조사 성과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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