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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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연구도 있다.
Ⅲ단계는 주구토광묘가 점차 줄어들고 관·곽토광묘의 조영이 증가하는 시기로 정리할 수
있다. 대체로 4세기 중반 이후 나타나는 모습인데, 이러한 요인에 대해서는 백제중앙과 밀접
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4지점 25호 관·곽토광묘 출토 청자반구호는 세교
지구 분묘축조 집단과 백제중앙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끝으로 분묘축조집단의 전통성과 능동성을 언급할 수 있다. 이 지역의 제지집단은 백제중앙
과 밀접한 관련을 맞고 있으나, 집단 내 전통성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집단 내 전통 묘제를 끝까지 유지하는 모습은 다른 지역과는 대별되는 모습이다. 주구토광묘
와 관·관토광묘 등 전통 묘제를 유지하면서 백제중앙과의 관계에서 얻어진 선진문물은 적극
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5.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어 통치하였고, 당시 오산지역은 漢山州
에 속한 水城郡이 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주군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면서 漢
州로 개명했다. 한주의 속·군·현이었던 지금의 오산 일부와 진위 지역에 해당하는 釜山縣은
振威縣.으로 개명됐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水城郡으로 편제되었던 오산지역은 고려시대에 들어 전국의 州 ·府·
郡·縣의 지방제도 개편에서 水州로 승격되었다. 수주는 10도 중 關內道 구역에 속하게 되었
으며, 행정적인 성격이 강한 都團練使가 파견되어 중앙정부의 지방편제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018년(현종 9) 수주에 知水州事를 둠과 동시에 안산·영신·정
송·용성·진위·양성·쌍부 등의 縣을 영속시켰다. 이 가운데 오산지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수주의 속현은 진위현으로, 진위현은 고려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존속되었으며, 1172년
(명종 2)에 監務를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오산지역의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역사 환경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세교지
구 내에서는 이러한 역사 환경을 뒷받침할만한 다양한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다. 먼저 주거지
는 2지구 13지점에서 11기가 수혈유구와 함께 조사된 바 있다.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에서 남쪽
으로 흘러내린 사면의 하단부로 사면에서 곡부 평탄대지로 연결되는 지점에 집중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앞선 시기의 취락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취락의 입지 변화는 저지대에 형성
된 평탄지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입지 선택으로 판단된다.
26 강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