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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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장방형의 형태에 내부에서 석재를 활용해 구들을 시설한 것으로 확인되나, 잔존상태가 불
량하여 정확한 구조적 특징은 파악할 수 없다.
토광묘 역시 2지구 5지점 등에서 조선시대 토광묘와 함께 산발적으로 조사된 바 있다. 5지
점 6호 토광묘 출토 청동기물과 청자상감연당초문발 등을 통해 무덤의 조영시기를 14세기 후
반경으로 편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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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 2지구 5지점 6호 고려시대 토광묘 ①전경 ②출토유물
6. 조선시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즉위 2년 후에 지방의 중심이 되는 25개의 大邑을 界首官으로 정하였는
데, 수원도 계수관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京畿左·右道를 京畿道로 개칭하였고, 수원은
都護府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러한 수원·오산지역은 都護府使가 파견됨과 아울러 세종대 후반
까지 경기도의 本營이 설치되기도 하였던 곳으로 관찰사가 주로 巡行하는 중요 지역이었다.
수원·오산지역은 임진왜란 때에 권율장군이 독산성에서 승전을 거두기도 하였는데 독산성
은 당시 수원지역의 유일한 관방시설로 수원부민의 대부분이 독산성에 올라가 난을 피하였다.
이에 독산성은 조정에서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려 차례 수축을 하여 경기남부의 요충지로
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1602년(선조 35)에 수원부사가 防禦使를 겸하며 한때 독산성에 鎭駐
하기도 하였으나 곧 방어사를 폐지하였다. 1668년(현종 9)에 別中營將과 討捕使를 겸하게 하
였으며, 1678년(숙종 13)에는 摠戒左右營將을 겸하도록 하여 중·후반기까지도 경기 남부의
행정·군사·교통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했던 수원·오산지역은 정조대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1789년(정조 13) 정
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園寢을 수원부 화산으로 천봉하면서 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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