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8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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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수원읍성과 독산성
조선시대의 수원은 종3품의 도호부사가 관장하는 도호부였다. 수원도호부의 주요 방어시설
로 독산성(禿山城)과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이 있었다. 1789년 정조가 수원 화산으로 사도세
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이장하고 팔달산 아래에 신도시 수원을 건설한 이후부터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1793년에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정2품의 유수가 관장하는 수원유수부로 한 단계 승격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는 수원유수부를 화성유수부로 개명하고 초대 유수에 좌의정을 지
낸 번암 채제공(1720~1799)을 임명했을 정도로 신도시 화성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화성유
수부는 장용영 외영의 5천 병력이 주둔하는 군사도시이자 농업과 상업을 아우른 자급자족의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1800년에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성장이 멈춘 도시이다. 이러
한 수원의 역사를 이해해야 비로소 오늘의 오산, 수원, 화성이 나누어진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수원은 오래되었으나 수원고읍성은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현재 수원고읍성이 있
는 화성시에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당성(唐城)이나 화량진성처럼 서해안에 위치한 오래된 산
성이 여럿 남아 있다. 그러나 독산성이나 당성과 달리 수원고읍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거듭 강조하지만 수원고읍성은 정조에 명에 따라 신도시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이름을 바꾸기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수원의 중심지였다. 더구나 수원고읍성은 독산성은
물론 화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수원고읍성을 잘 알지 못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도세자와 정조
가 잠들어 있는 화산 융릉과 건릉 주변이기 때문이다. 사실 ‘수원고읍성’이란 용어는 최근에 만
들어진 것이다. 수원읍성이라는 본래 이름 사이에 ‘고(古)’자를 굳이 넣은 것은 화성을 품고 있
는 현재의 수원시와 구분하기 위함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수원고읍성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수원이라는 고을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271년(고려 원종12년)부터이다. 그 동안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와 옛 기록을 참고해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읍성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789년 정조가 팔달산 자락으로
수원읍치를 옮기기 전만해도 융릉과 건릉이 자리한 화산 주변은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수원부
의 관아 부속 건물과 민가들이 즐비했던 읍성의 중심이었다.
76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