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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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보았듯이 광해군은 수원고읍성과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선조실
                        록>을 보면 1593년 겨울에 왕세자(광해군)가 저녁에 수원부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다. 이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수원은 “경기의 큰 고을로 양호(兩湖)의 요충지이자 서울의 보장지”라거나
                        “실로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군병이 있는 곳”으로 높이 평가했던 사실을 이를 반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1597년(선조30) 4월 20일자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수원은 경기의 큰 고을로

                        양호(兩湖:충청도와 전라도)의 요충지이자 서울의 보장지이고 또 산성을 지키는 일과 군병을
                        조련하는 책무가 있습니다.” 4년이 지난 1601년 3월 17일에도 이러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수원은 기보(畿輔:경기도) 중에 가장 큰 고을로서 무인이 거의 1천 명에 이르니, 실로 우리나

                        라의 정예로운 군병이 있는 곳입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군사를 조련하였고 독산성과 같은 요
                        새지도 있습니다.” 1603년 2월 18일의 비변사가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를 통해 독산성을 모범

                        으로 남한산성이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남한산성의 형세에 대해서 본사(本司: 비
                        변사)에도 익히 살펴본 사람이 있습니다. 둘러싸인 가운데에 완연히 한 도읍이 이루어졌는데,
                        산굽이가 몹시 깊어 바깥에서 굽어보거나 엿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옛날에 백제가 이곳을 국

                        도로 삼은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다 성을 쌓은 다음 한 결같이 독성(禿城)에서처럼 군사를 조
                        련하여 안으로는 경도(京都: 한양)의 보장이 되고 바깥으로는 제진(諸鎭)을 공제하게 한다면
                        참으로 장구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1610년(광해2) 1월, 비변사의 “경기 지방의 산성이 무려 열일곱 곳이나 되는데 적이 물러간
                        뒤로 점점 폐지되고 오직 수원의 독성만이 꾸준히 수리되어 왔습니다.”라는 보고문은 독산성
                        의 독보적 위치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헌신적인 군사 활동으로

                        신하와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1608년에 선조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의 수원 사랑은 각
                        별했다. 광해군은 종묘나 성균관에 거둥할 때 수원에서 병사를 뽑아 자신의 호위를 맡겼을 정

                        도로 수원의 군사를 신뢰했다. 국왕의 신뢰와 관심에 힘입어 수원은 조선을 대표하는 무향으
                        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614년 4월에는 “급히 선전

                        관을 보내어 수원과 강화의 군사 각 2백 명씩을 징집하여 엄히 호위하게”하였고, “종묘와 알성
                        의 거둥 때에는 수원과 강화도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호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외교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광해군이지만 내정에 실패하여 결국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1623
                        년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서인이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실리외교
                        를 버리고 기울어가는 명에 의존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이라는 두 번의 전쟁을 불렀다. 조선이 후금과의 전쟁에서 연거푸 패배한 것은 사실 예견된 일



                                                                     무향(武鄕)의 터전, 수원고읍성과 독산성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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