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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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 공간이 되었다. 현륭원터에 있던 강무당은 화성 행궁 옆 화서문 쪽으로 옮겼다. 강무당은
                        장용영 외영의 무사를 교육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 현륭원으로 모신 1789년부터 승하한 1800년까지 12년
                        동안 13차례 찾았다. 정조는 백성들이 행복한 행차인 행행(行幸)을 통해 백성의 소리를 들었
                        다. 행행을 하면서 군사를 다각도로 훈련시켰던 점도 돋보인다. 이런 점에서 원행에 나서는 정

                        조의 차림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창덕궁 돈화문을 나설 때부터 현륭원에 도착할 때까
                        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착용했었다.
                         정조가 즉위 3년이 되던 1778년에 밝힌 네 가지 국정목표는 24년간의 정조시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그것은 민산, 인재, 융정, 재용이다. 세 번째로 꼽은 융정(戎政)은 독산성과 화성
                        에 집약되어 있다. 정조는 융정의 개혁을 밝히고 난 뒤 이런 말로 마무리했다. “군자는 싸우려

                        하지 않으나,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君子有不戰, 戰必勝).” 이 발언은 국방에 대한 정조의 굳은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Ⅸ. 수원고읍성과 독산성, 그리고 화성의 현재, 그리고 미래





                         앞에서 살펴본 본 것처럼 2천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독산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400년 전
                        부터 특별하게 관리되었던 성곽이다. 현재 독산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노력이 진행되
                        고 있다. 반면 독산성에 못지않은 역사를 가진 수원고읍성의 존재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

                        았다. 현재 성문은 물론 성벽조차 대부분 허물어져 원형을 간직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성벽이 서 있던 자리만 몇 군데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거의 잊혔던 수원고읍성이 최근 이 지역을 택지지구로 개발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이 지역 안에 수원고읍성의 성벽을 비롯하여 정조의 초장
                        지가 있다. 정조의 초장지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죽어서도 돌보겠다는 아들

                        정조의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륭원과 초장지터는 한국인의 효(孝)의 성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택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은 마땅히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수원고읍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으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융

                        건릉 매표소 부근을 공사할 때 관청건물지로 보이는 초석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수



                                                                     무향(武鄕)의 터전, 수원고읍성과 독산성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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