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오산문화총서 2집
P. 88
원고읍성의 주요 시설물들이 융릉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수원대학교 도서관
건물 쪽에도 성터가 일부 남아 있다. 현지 주민들이 ‘고수문(古守門)’이라 부르는 곳인데 수원
고읍성의 서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지점이다. 수원대 도서관 건물부터 시작되는 성벽의 흔적
은 수기리까지 연결되어 있다. 치리고개에 북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남문터는 융릉 건릉의
건너편 도로변에 남아 있다. 치리고개에서 화산을 오르면 산허리 중간쯤에 융릉경내를 알리는
입산금지 표식이 있고, 건릉 경내에 역시 성터가 남아 있다. 따라서 수원고읍성은 성황산과 화
산을 연결하는 능선과 골짜기를 포함하여 축조된 포곡식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수원고읍성과 독산성, 그리고 화성은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지
리의 이로움을 최대한 활용한 성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던 것이다. 독산성은 삼국시
대부터 조선이 끝날 때까지 2천년의 긴 세월 동안 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공간으로 존재
했던 국방유적이다. 수원고읍성 역시 화성이 축성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수원의 백성을 품고
있었던 삶의 공간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거푸 겪은 조선의 지도층은 백성을 동원하여 성곽을 새로 쌓고 보
수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때 사관은 붓을 들어 이러한 정책을 내린 조정 대신들을 향해 날선
비판을 기록했다.
“백성들이 병들었고 부역이 몹시 많은데 백성들을 쉬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는 것은
지금이 바로 적당한 때이다. 그런데 인화(人和)가 바로 굳건한 성(城)이라는 것은 모르고 지리
(地利)의 험고한 것만을 믿으려고 하니, 금성탕지(金城湯池:천혜의 요새)가 있다 하더라도 백
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데에야 소용이 있겠는가.”
천하의 요새도 사람들 사이의 화합만 못하니 먼저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라는 것이다. 독산
성과 수원고읍성, 그리고 화성은 지도층이 백성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실천했을 때만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2016년의 대한민국은 사회지도층의 불의와 임무태만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경제의 부흥과
튼튼한 국방도 인화에서 비롯된다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다.
86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