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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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들에게 먼저 가야한다는 爲民意識의 발로이자 극빈계층의 사회복지 정책 측면에서의 강
조였다.
“저 의식이 조금 여유 있는 사람은 자연히 제때에 간호할 수 있지만, 가난한 선비, 궁한 백성
들 중 고할 데도 없는 사람에 있어서는 그 누가 구제해 준단 말인가? 저들의 광경을 생각하면
눈으로 본 것 같다. 사람마다 병을 진찰해 주고 집집마다 약을 지급하는 것은 물론 의논하기
어렵지만, 가장 가난한 무리를 들은 대로 구제한다면 조금이나마 실효가 있을 것이다.” 1)
이로 볼 때 정조의 의료정책은 모든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빈민들에
대한 구제가 더욱 우선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새로운 醫書를 간행되어 자신에게 바쳐지면 의서를 검토하여 전국의 각 지방으로 배
포하게 하였다. 1786년(정조 10) 5월 박상돈과 남기복이 엮은 『疹疫方』이라고 하는 홍역 치료
에 대한 의서가 바쳐졌을 때도 이를 기존의 한문으로 된 내용에 언문으로 번역하여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2)
의서가 한문으로만 간행되면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없어 병의 치료를 원활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정조가 생각하고 있는 의료의 대중화 정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지방행정구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에 대한 의료정책을 추진하였던 정조는 화성유
수부를 기반으로 지방 의료정책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1793년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킨 정조는 이에 걸 맞는 도시 위상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화성은 장기적으로 자신이 거처할 도시였기에 상왕이 거주할 공간으로서의 새로운 관
청을 설립하였다. 기존의 수원도호부 관아를 화성행궁으로 승격시켜 행궁을 정식으로 설치하
였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행정관청의 分所를 새롭게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신 기관 설치 속에
서 수원지역의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의료기관의 설치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도성을 제외하고는 典醫監·惠民署·活人署 등 일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의료기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3)
각 지방에서 발생한 각종 전염병에 대하여 임시로 조정의 醫官을 파견하여 조처할 따름이었
1) 『正祖實錄』卷21, 10年 4月 癸巳.
2) 『正祖實錄』卷21, 10年 5月 辛未.
3) 이규근, 「조선시대 내의원 연구」『조선시대사학보』2. 1997.
정조대 화성유수부의 의료기관 고찰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