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5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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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양성된 의관이었기에 그 수준은 조선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이들 의관들은 대부분 조
정의 의료기관에 남아 근무를 하였기 때문에 지방으로 임명되는 경향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
하고 화성유수부의 위상으로 인하여 특별히 임명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새로 임명된
의관이 어느 곳에서 근무하였는지는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수원과 관
련된 각종 읍지와 화성유수를 역임했던 서유구의 『華營日錄』에도 의관이 어느 곳에서 근무하
였고 규모의 크기에 대하여는 기록되어 있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다만 『수원하지초록』의 약방
에 대한 기록과 조정에서 의관을 화성유수 및 판관과 함께 임명한 것으로 보아 화성행궁 혹은
7)
貳衙 에 약방의 공간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화성유수부의 공식적인 의관과 더불어 조정에서 임명된 또 다른 의관이 존재하였다. 1793년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고 장용외영을 화성유수로 임명하였다. 화성유수부와 장용
외영을 지휘하는 인물은 동일하지만 체제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장용영외영은 군대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용외영의 장졸들을 위한 의관 임명은 당연한 것이었다.
장용외영은 도성의 장용내영과 그 체제가 유사하기 때문에 군영에 필요한 각종 인원은 대동
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장용외영에는 장용내영과 마찬가지로 藥房 1원과 鍼醫 1원을 두었다.
아울러 장용외영의 기병인 친군위에 반드시 필요한 馬醫 1원이 임명되었다. 8)
약방과 침의는 도성과 지방을 논할 것 없이 침술업이 정밀하고 밝은 사람으로 국왕에게 아
뢰어 분부를 받아 차출하여 임명하였다. 이들 약방과 침의는 중요성을 인정받아 하급 관리임
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敎旨로 임명되며 이를 장용영 餉色提調의 직인을 찍어 巡令手가 전해주
었다. 더불어 약방은 內醫院으로 옮겨 보내더라도 그대로 겸임하게 할 정도로 실력 있는 인물
을 파견하였다. 9)
약방과 침의는 軍校들의 환자를 간호하는 것만이 아닌 화성유수부에 있는 貧民을 구원하거
나 치료해 주는 일을 맡았다. 화성유수부에 임명된 의관 1명으로 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 없었
기 때문에 장용외영의 약방과 침의로 화성유수부내의 빈민을 치료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당
시 군교 중에서 약 재료를 자기 능력으로 마련하여 준비하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 장용외영에
7) 이아는 화성유수부에 있는 특별한 행정기관으로 화성행궁이 정조의 행차를 맞이하고 유수가 행정을 하는 곳이었기에
두 번째 관아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이아는 현재 신풍초등학교 앞에 있는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가 들어선 자리다.
8) 『壯勇營大節目』卷1, 軍制.
9) 『壯勇營大節目』卷1, 差除.
정조대 화성유수부의 의료기관 고찰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