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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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을 제외하고는 수원 화성 건설의 주역인 조심태 장군 정도를 기억할 뿐 이 시기 장수의 이
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시백과 류혁연은 우리가 마땅히 기억해야할 장군이다. 두 사람 모
두 수원부사로 재직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류혁연의 생애를 통해 전쟁이 없는 시기에
장수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살펴 볼 수 있다.
효종이 이완을 발탁하여 북벌정책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완과 함
께 효종의 북벌정책에 앞장섰던 류혁연 장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북벌정책을 추진하던 효
종이 경기도를 대상으로 군사검열을 했을 때 류혁연은 수원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때 도
전체에서 수원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자 효종은 류혁연을 승지로 발탁하여 군사정책을 의논했
다. 무인을 승지로 발탁했던 사례는 류혁연이 처음이다. 이후 류혁연은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번갈아 역임하며 효종의 북벌정책에 앞장섰다. 류혁연은 훈련대장으로 효종, 현종, 숙종의 3대
에 걸쳐 활약했으나 1680년에 서인 김석주가 주도한 경신대출척으로 남인계 영의정 허적, 윤휴
와 함께 역모혐의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역사에 묻혀버린 무인이다.
류혁연은 어영청을 북벌의 주력군으로 확대 개편하고, 훈련별대를 만들어 재정을 줄이며 군
사력을 강화했다. 또한 이완과 협력하여 인조반정 이후 군영에 성행했던 ‘기찰(譏察:사찰)’을
근절시켰다. 훈련대장으로 공조판서를 겸임하면서 화약의 원료가 되는 유황광을 개발하고 조
총을 비롯한 화기의 품질을 크게 높였다. 류혁연은 본국검을 비롯한 창검 무예를 정리하여 군
영에 널리 보급했을 뿐 아니라 훈련도감에 소속된 검객 김체건을 왜관에 밀파해서 일본 검술
을 익혀오게 했을 정도로 조선군의 전력 강화에 헌신했다.
효종을 이은 현종도 수원을 주목했다. 현종이 재위하던 시기에 수원고읍성 안에 국왕이 거처
할 수 있는 별당을 마련했다. 현종의 아들 숙종이 재위했던 시기에 별당의 시설이 확장되어 ‘행
궁(行宮)’으로 승격했다. 물론 이 시기에 행궁을 보호하기 위해서 읍성이 보수되었다. 숙종이 노
량사장에서 군병을 친열하면서 “수원의 군병은 가장 정예하다”라고 했던 칭찬이나 “수원의 7
천 병마는 본래 날래고 사납다”라는 대신의 말은 ‘무향(武鄕)’ 수원의 실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692년 가을, 숙종이 노량사장에서 수원의 군병을 친히 사열한 뒤에 이런 평가를 내렸다.
“시골 군사들은 조련이 대체로 생소하여 대부분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데, 유독 수원은 그렇
지 아니하여 정예하다.”
무향(武鄕)의 터전, 수원고읍성과 독산성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