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4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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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와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
                       권의 최정예 병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직전 수원의 상황을 알려주는 <인조실록>의 기사는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삼가 듣건대, 수원부는 호(戶)마다 대오에 편입하여 여리(閭里:마을)에서는 병사가 되지 못하
                       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수원의 군병 중에 아직도 도망하는 자가 있는 것

                       은 온 나라 백성을 모두 병사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관서(關西: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이 교생을 모두 모아서 대오에 편입시키고 ‘교생군’이라고 호칭하자 민중이 싫어하지 않은
                       것은 명분이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인조실록 1636년 9월 13일)

                        이처럼 병자호란 직전에 수원사람들은 병사가 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상무
                       적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관서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을 모두 모아서 대오에 편

                       입시키고 ‘교생군’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통해 임진왜란 이후에도 ‘서검재’가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아무튼 임진왜란부터 발휘된 수원사람들의 상무적 기풍은 병자호란에도 발휘되었
                       다. 이러한 수원의 상무적 분위기는 김준룡 장군이 지휘한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Ⅵ. 북벌의 뜻이 담긴 수원고읍성과 독산성





                        효종이 즉위하면서 수원고읍성과 독산성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효종은 “수원의 군병

                       이 훈련도감보다 많고 실력도 낫다”는 신하의 평가를 듣고 “수원은 본디 무향(武鄕)”이라고 화
                       답했을 정도로 수원의 상무적 기풍을 높이 평가했다. 효종과 현종시대에는 수원의 군병이 7천
                       에서 8천명이나 되었다. 당시 훈련도감의 병력이 5천인 것을 생각해 보면 수원의 군병이 얼마

                       나 많은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군병의 숫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군병의 실력이다.
                       참고로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병 5천 명 전원이 급료를 받는 직업군이다. 따라서 ‘수원은 본디

                       무향’이라는 효종의 발언은 매우 주목되는 것이다.
                        1636년의 병자호란부터 1866년의 병인양요까지 230년 동안 조선은 외적의 침략을 받지 않
                       았다. 다만 그 사이 두 차례의 내란이 있는데 영조에 반대해 일으킨 ‘이인좌의 난’과 평안도 지

                       역차별에 들고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이런 까닭에 효종의 북벌정책을 수행한 이완




                       82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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