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9 - 오산문화총서 2집
P. 79

수원에 관한 최초의 종합보고서라 할 <세종실록지리지> ‘수원도호부’에 수원의 역사가 실려
                        있다. “본래 수원은 고구려의 매홀군인데 신라가 수성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가 …수주(水

                        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13년 계사(1413)에 수원도호부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수원이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백제가 한강유역
                        을 가장 먼저 차지했던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보면 수원은 본래 백제의 영토였을 가능성도 적

                        지 않다. 따라서 수원읍성이 축성된 시기는 백제 초기에 독산책(禿山柵)을 설치했던 기원 전 8
                        년 무렵(온조왕 11년 7월)으로 짐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드는 한 가지 의문은 “읍토성(邑土城) 둘레가 270보요, 안에 우물 두

                        개가 있다”라는 기록의 사실 여부이다. 읍성의 규모치고는 둘레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그런
                        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모두 “읍성은 토축이며, 둘레가 4,035척이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지리지>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적
                        지 않다. 각수가 판각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글자를 하나 빠트렸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정조실록>과 <장용영고사>를 보면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은 수원부의 강무당(講武堂)

                        이 있었던 곳이다. 정조가 잠들어 있는 건릉은 옛 향교가 있었던 곳으로 무기고 자리라는 사실
                        도 흥미롭다. 그렇다면 융릉과 건릉 앞에 펼쳐진 너른 평지 숲은 1789년 이전까지 수원도호부
                        에 소속된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수원고읍성은 독산성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있다. 기각지세란 달아나려는 사슴의
                        뿔을 앞에서 잡고 뒤에서 다리를 잡는 것처럼 적의 앞뒤에서 적을 협공한다는 뜻이다. 훗날 화
                        성이 건설되면서 신도시 수원은 수원고읍성 대신 화성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Ⅲ. 사통오달의 땅





                         수원은 중국과 직접 문물을 교류할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수

                        원읍성을 차지하려는 삼국간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수원
                        고읍성 주위에는 독산성을 비롯하여 수기리성, 요리성, 당성이 늘어서 있다. 고려시대에 4개
                        역(驛)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수원은 교통의 요지였다. 뿐만 아니라 염불산, 해운산, 흥천산으

                        로 연결되는 봉수, 즉 통신망도 갖추고 있었다.



                                                                     무향(武鄕)의 터전, 수원고읍성과 독산성   77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