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1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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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 평양에서 진군을 멈추었기에 망정이지 계속 북상했다면 의주조차 위태
했을 것이다. 고니시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한 까닭은 수군과 의병이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
이다. 2만2천 명의 병력을 갖춘 제2군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함경도를 점령하고 왕자 둘을
사로잡았다. 한양을 포기한 조선 관군은 국왕 선조가 피난하고 있는 평안도로 총집결했다.
조선의 외교력은 물론 정보력도 취약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통신사가 일본에
다녀왔음에도 전쟁이 일어날 것인지 의견이 나누어졌고, 일본의 전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
다. 섬나라 일본은 수전(水戰)에 강할 것이므로 육전에 주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수전에 취약하고 오히려 육전에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궁
시(弓矢)는 신무기 조총보다 우월한 병기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조총의 위력이 궁시를 압도한
다는 사실을 전투 초기에 알게 되었다. 남북 변방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도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도 전쟁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최악의 패전으로 꼽히는 광교산 전투를 통해 수원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되었다.
1592년 5월 초, 전라병사 이광 휘하의 삼도(전라, 경상, 충청)에서 모인 5만의 대군이 와카자
키의 왜군 1,600명에게 대패한 광교산 전투는 조정을 충격에 빠트렸다. 광교산 전투 역시 장
수의 두려움과 오판이 패배의 결정적 이유이다. 광교산 전투를 벌이기 전에 권율은 총대장 이
광에게 수원 독산성으로 진을 옮길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 광교산 전투에서 패해 전라
도로 퇴각했던 권율이 이치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권율은 군사를 이끌
고 다시 북상하여 독산성에 주둔하며 한양 수복의 기회를 노렸다. 권율은 독산성을 무대로 기
습전과 유격전으로 왜군을 물리친 후 명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기 위해 고양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겼다. 그러나 명나라 이여송 부대는 벽제관에서 왜군의 기습작전에 말려 참패를 당했다. 평
양성을 빼앗겨 의기소침했던 왜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로 3만을 총동원하여 행주
산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권율은 2천3백 명의 병력으로 3만 명의 왜적을 물리치는 행주대첩의
신화를 이루었다.
Ⅴ. 경기도의 의병과 수원산성
평안도는 경기도의 관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지킬 수 있었다. 경기도는 경상도와 더불어 일
무향(武鄕)의 터전, 수원고읍성과 독산성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