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0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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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 3월, 집현전 학자 양성지가 세조에게 올린 상소에 “수원부는 본시 관찰사의 관사를
둔 땅이며, 고려 때에 홍건적이 남하할 때에는 여기를 경유하여 사통오달할 땅입니다”라는 표
현이 등장한다. 수원은 일찍부터 경기도 행정의 중심이며 교통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원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전략적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수원과 오
산은 태종대부터 국왕의 사냥터이자 전마를 양성하는 목장으로 활용되었다(태종16년 2월20일).
세종은 수원과 오산을 강무(講武) 장소로 애용했다. ‘강무’란 국왕이 친림하여 실시하는 군사
훈련으로서의 수렵대회를 말한다. 세종은 1만 명 이상의 군사를 동원하여 경기도 수원이나 강
원도 횡성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을 벌였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수원과 오산은
세종이 세자와 종친을 거느리고 강무하고 매사냥을 벌였던 장소였다. 책만 보았던 학자 세종이
아니라 수원과 오산의 너른 들판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말을 달리며 노루와 멧돼지를 사냥하는
문무겸전한 세종의 면모를 여기서 확인하게 된다.
<세종실록>은 세종의 강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수원부 오산원(烏山院) 들에서 사냥을
하였고(세종15년 4월 22일)”, “수원부 동쪽 들판에서 사냥하다가 오산을 거쳐 진위현으로 이동
했다(세종17년 10월 12일).” 또한 수원부 홍원곶(弘原串)은 매년 하삼도 목장과 제주에서 바친
말 1백 필을 목양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세종30년 7월 27일). 이처럼 조선 초기의 수원은
후방 보급기지의 역할을 맡았던 고을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북방의 여진족과 몽골족이 주로
침략했기 때문에 한양의 남쪽에 위치한 수원은 안전한 후방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Ⅳ. 임진왜란으로 수원고읍성과 독산성이 주목을 받다
그러나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수원의 역할은 크게 달라진다. 임진왜란으로 드러난 조선군
의 전력은 기대 이하였다. 부산포와 동래성에서의 결사항전을 제외하고는 경상도에서 관군이
제대로 된 전투를 한 번도 벌이지 못했다.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던 신립 장군조차 충주전
투(탄금대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참패를 당했다. 100년의 내전을 통해 최강의 전력
을 갖춘 왜군에 비하면 전라도 수군을 제외한 조선군의 전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1592년 4
월 13일 부산포에 도착한 왜군은 불과 20일 만인 5월 초에 한양을 무혈점령했다. 한강 방어선
과 임진강 방어선은 물론 평양 대동강 방어선까지 모두 뚫렸다. 1만8천 명의 병력을 갖춘 고니
78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