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6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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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독산성과 수원고읍성은 한국 무예의 성지
효종이 승하한 1659년부터 꼭 100년이 지난 1759년에 사도세자는 효종의 북벌정책을 계승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무예신보>를 펴냈다. 사도세자는 16살부터 효종의 ‘원대한 뜻’을 계승
하겠다며 창덕궁 후원에서 효종이 사용하던 월도와 철주를 들고 무예를 익혔던 대장부였다.
1760년 초가을, 사도세자는 온양 온천으로 가던 길에 독산성을 찾았다. 이때 사도세자는 독산
성에서 효종이 묻히려 했던 화산을 바라보고 수원읍성을 찾아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독산성에 돌아와 무예를 시험하고 활을 쏘았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에 사도세자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정조는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1789년 초가을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
를 수원부 강무당이 있는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을 조성했다. 이때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 이
덕무와 박제가, 장용영 장관 백동수를 불러 <무예신보>를 계승하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
도록 지시하여 이듬해 4월에 장용영에서 간행했다. 사도세자와 독산성의 특별한 인연을 주목
한 정조는 1791년 독산성에서 지역민들을 만나고 활을 쏘았던 일을 재현했다. 이처럼 수원고
읍성과 독산성은 효종과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를 연결하는 특별한 유적이다.
Ⅷ. 읍성은 왕릉이 되고, 빈 들판은 대도회가 되다
1789년 10월 6일, 천장을 마치고 정자각에서 하룻밤을 지낸 정조는 7일 아침 일찍 화산에
올랐다. 산을 내려온 정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지시했다.
“이 산은 화산이니 꽃을 많이 심으면 좋겠다.”
정조의 명에 따라 화산을 비롯하여 화성과 독산성 주위에도 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었다. 빈
터가 된 수원고읍성 주변에도 소나무와 꽃나무가 자랐다. 화산과 성황산 자락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 용주사도 중창되었다. 동시에 일반 백성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이때부
터 수원고읍성은 백성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역사의 뒤란으로 묻히게 되었다. 고려시대부터
500년 동안 번영을 누리던 수원고읍성은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인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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