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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투표율을 기록했다. 오산읍에서는 투표인 1만 2,269명 가운데 1만
1,250명이 투표하고 그 가운데 9,975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91.7%의 투표율과 88.7%의 찬성투표율
은 전국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제4차 국민투표(1975년)와 제5차 국민투표(1980년)는 권위주의체제의 존속과 복원에 대해 국민들
의 의사를 물었다. 제4차 국민투표에서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고, 제5차 국민투표는 5공화
국의 출범과 대통령간선제 및 7년 단임제에 대한 동의여부를 물었다. 장기간 지속된 독재권력에 대
해서 국민들은 79.8%의 투표율과 73.1%의 찬성률을 보였고, 화성군에서도 각각 87.5%, 75.3%로 나
타났다. 그러나 박정희의 피살, 광주민주항쟁, 그리고 발전시기 최초의 마이너스성장이라는 극도
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혼란과 위기를 거치면서 위축된 국민들은 제5차 국민투표에서 96.5%,
91.6%의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양상은 각각 92.4%, 94.9%를 기록한 오산읍에서도 동일하
게 나타난다.
제6차 국민투표는 1987년 민주화이행이 이끌어낸 대통령직선제개헌이었다. 이른바 6·29선언 이
후 여야합의로 마련된 개정안은 민주적 정통성의 확립, 대통령직선제와 5년 단임제 등 권한약화, 국
회의 권한강화와 사법권의 독립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72.8%라는 높지 않은 투표
율이었지만, 찬성률은 93.0%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성군
(오산읍 포함)에서는 90.7%의 투표율과 93.4%의 찬성투표율을 기록하였다.
2.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에 근거하여 새로 조직된 헌법기관으로서 주된 임무와 권한은 대통
령의 간선과 대통령이 일괄 지명한 국회 의석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이른바 유정회 국회의원후보
전원을 찬·반투표에 부쳐 선출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2년과 1978년에 2기
에 걸쳐 구성되었고, 네 번의 대통령 선출과 한 번의 유정회 국회의원 선출을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치러냈다.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는 1972년 12월 15일 실시되었는데, 전국적으로 6,164명이 입후
보해 2.6대 1의 경쟁을 거쳐 2,359명을 선출하였다. 오산읍에서는 선거인 1만 2,318명 가운데 8,501
명이 투표해 69%의 투표율을 나타내는 가운데 모두 6명이 입후보했으나 김준학이 1,843표, 이태우
가 1,560표로 당선됐다.
오산시사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8년 5월 18일 유신정권의 막바지에 실시됐다. 정원은 초대에 비해
224명 늘어나 2,583명이었고, 경쟁률은 2.16대 1이었다. 오산읍에서는 선거인 1만 8,480명 가운데 1
만 4,124명이 투표해 76.5%의 투표율을 보였다. 제1대 대의원인 김준학을 비롯하여 4명이 입후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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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였는데, 차명환이 4,341표, 김명호가 4,200표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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