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오산문화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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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VOL. 65 osan culture
하기를 “어머니 역시 어찌하여 배고프
신 것을 참으시고 할머니를 공양하십
니까?" 하고 말하곤 하였다.
선생의 나이 10세에 부친께서 칼에 엄
지손가락을 다쳤는데 백약이 무효함
으로 선생이 사람들에게 널리 수소문
하여 무슨 좋은 약이 있는가하고 물
은 즉,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혈갈(血
竭)이 사람의 피를 말려 만든 것이리라
함으로 선생이 방으로 몰래 들어가 허
최정린효자정려각과 정려문
벅다리를 찔러 피를 내어서 이를 불에
선생의 본관은 수성(隋城)으로 자(字)는 성서, 호는 탑서재 말려 다친 곳에 붙여 드린 뒤에 효험
(塔西齋)이다. 수성 최씨는 고려 때 수성백 최영규에게서 비 이 있어 완치되었다고 한다. 부친께서
롯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공을 많이 세웠다. 선생 는 그 뒤에 자세한 내용을 들으시고 늘
은 1760년(영조36) 11월 11일 오산시 두곡 1동(당시 수원부 초 그 손가락을 들고 이것은 우리 아이의
평면 두곡동) 자택에서 태어났다. 최정린 선생의 부친 최진복 효성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崔進福)은 자질과 품격이 단단하고 깔끔하여 세속에 매이지 한다.
않는 선비였다고 한다. 모친은 밀양 박씨로 천성이 어질고 후 경자년 가을에 어머니께서 분만으로
덕하여 시부모를 섬김에 효를 다하였고, 친척들에게는 따뜻 인한 혈허병(血虛病)을 앓게 되어 매우
한 마음으로 대하였으며 손재주도 정교하고 재능이 많았던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선생께서는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목욕하고 신에게 기도를 드림은 물론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는 것 하늘을 향해 울면서 호소하기도 하였
도 잊어버리고 꼭 부모님께 공양하였으며 늘 할머니를 모시 다. 어느 의원이 말하기를 가물치가 제
고 밥을 먹으면서 할머님이 남긴 반찬을 주시면 반드시 이를 일 좋다고 하나 때마침 깊은 겨울이라
어머님께 갖다드렸으며 어머니께서 혹시 되돌려 주시면 굳이 물은 단단히 얼어붙었으나 선생은 곧
사양하여 말하기를 “저는 이미 많이 먹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석천(石川)의 옆으로 가서 얼음을 깨니
한다. 집안 살림은 청빈하였고 어머니께서 시어머니를 정성껏 가물치가 틈에서 뛰어나와 이를 얻어다
봉양하는 것을 보고 본받았으며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어머 가 어머니께 달여 드린 후 과연 효험이
니께 드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너는 어찌하여 배 있어 완치되었다. 또한 부친께서는 평
고픈 것을 참고 나를 공양하느냐?” 고 말씀하시면 대하여 말 소 해소병이 있어 기침, 가래가 심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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