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오산문화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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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VOL. 65 osan culture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정세규가 말하기를 “피하자.” 하므로, 전란이 끝나고 인조의 특명으로 홍문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분연히 말하기를 “어찌 이런 말을 하십 관 교리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니까. 신하는 마땅히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이 신하의 직분입니 에 추증되었으며, 정려각은 1815년(순
다.”하고 물러나 인신`관인을 마졸에게 주며 이것이 나라의 공 조 15)에 오산시 서동 산 66-1번지에
기이니 네가 가지고 돌아가라 했다. 세워졌다.
잠시 전에 아군의 수장이 또 적에게 패하여 겨우 몸만 탈출하 한편, 선생의 묘소는 원래 인천의 도
니 패한 군사들이 적의 진중으로 투항해 들어가는 자 수백이 장리 선영에 있었으나, 오산시 서동 산
었다. 선생이 크게 부르짖기를 “사나이가 죽을지언정 어찌 구 66-1번지로 이장되었으며, 묘역은 매봉
차하게 살기를 도모하여 몸을 보존하려는가.” 하니 도망가던 산 남향능선 하단에 위치한 부평 이씨
군사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선영 상단(정려문이 있는 구릉의 반대
선생은 언덕 위 양식더미 위에 올라가 활을 당겨 적을 쏘니 편으로 서동의 동촌과 서촌을 잇는 포
죽거나 다치는 자가 많았으므로 서로 경계하며 가까이 오지 장소로의 우측 편)에 있다. 충신 이상
못했다. 날아오는 화살이 연이어 어깨와 가슴에 맞았으나 선 재 행장은 공의 외손인 개성유수 송징
생은 태연히 화살을 뽑고 전과 같이 활을 당기었다. 그러나 은이 지었다.
화살은 떨어지고 힘은 다했는데 다시 적의 화살에 맞으니 끝 현재도 선생의 이러한 강직한 나라 사
내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선생은 인조 임금이 대피한 남한산 랑의 자세는 유효하고 모범이 될 만하
성을 향하여 진군하다가 용인의 험천에서 적의 협공을 받고 다. 말없이 묵묵하게 국가에 몸 바쳐
전사한 것이다. 충성하는 현 우리의 군 장병들의 모습
이 이와 같지 않겠는가?
국가는 늘 이러한 분들의 노력과 헌신
으로 지탱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일 것이다.
이상재충신정려각과 정려문,
협간을 둔 조선 후기의 독특한 구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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