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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적인 문제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일본인 대지주들의 농장은 기업형으로서 플랜테이션 농
                  장경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더구나 동척의 경우는 전국을 단위로 하는 기업형 농장운영의 대표적

                  인 사례이다. 이들 농장에서는 이윤 창출의 극대화를 목표로 했다. 때문에, 소작권을 볼모로 하여 소
                  작농들을 착취하였던 모습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농장 운영상에서 농장의 관리자들인 농감이

                  나 부농감의 횡포가 심했다. 이러한 기업형 농장운영의 구조 속에 소작지 또한 감소하면서 소작농들
                  은 소작권 이동과 소작료 인상에 대한 불안감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결국, 소작농들은 연대투쟁을

                  통한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거대 자본을 앞세운 일본인 대지주들에게 소작인 전체가 힘을 모아 적극
                  적인 투쟁을 벌여나갔다.






                  제2절    오산의 독립운동


                    오늘날 오산시는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상 수원군의 성호면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식민지의 행정적

                  강화 속에 많은 지역민들은 차별과 불평등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은 식민지 지배 체제
                  에 굴복하지 않았다. 1919년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인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면의 3·1운동을 시작

                  으로 성호면도 오산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천도교도와 청년 학생들의 주도
                  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가한 야만적 탄압과 수탈 속에 식민지 백성들의 인권이라는 것은
                  보호를 받지 못했다. 식민지 백성의 인권은 자율적 인권이 아닌 억압과 강제에 의한 타자적 인권으로

                  전락했다. 즉 식민지배자의 의도 아래 차별과 강제가 존속한 인권의 박탈이었다. 3·1운동은 일제강
                  점기 폭력과 억압, 차별과 냉대, 예속적 관계 등에 대한 저항으로서 조선 민중이 분연히 떨쳐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식민지하의 생존권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 인권 투쟁이었
                  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중의 역량을 보여준 최대의 민족해방투쟁은 3·1운동이었다. 3·1운동에서 나
                  타난 조직력과 투쟁성은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에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의 경험은 일제

                  의 식민통치에 변화를 가져왔고, 많은 청년과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에 영향을 받은 젊
                  은 지식 청년들은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더구나 이들은 세계사적 흐름 속에

                  서 새로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식민지를 극복하고자 했던 열망을 더해갔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젊은 지식청년들의 등장으로 성호면에서는 ‘오산청년동맹’이 조직되
      오산시사
                  어 새로운 사회사상을 받아들이고,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계급 투쟁 속에서 교육활동과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이 병행되었다. 오산을 중심으로 한 젊은 청년들의 활동은 해방 직전까지도 이어지면서 오

      제
      2           산지역 독립운동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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