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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8. 오산지역 3·1운동 주모자
이름 나이 직업 주소 실형
李成九 25세 농업 수원군 일형면 조원리 342 징역 1년 8월
金敬道 34세 농업 수원군 성호면 오산리 344 징역 1년 6월
孔七甫 36세 농업 수원군 성호면 궐리 159 태 90
李圭璇 25세 농업 진위군 북면 봉남리 282 징역 1년 8월
鄭奎煥 25세 농업 수원군 성호면 오산리 징역 1년
兪鎭弘 34세 농업 수원군 성호면 세교리 징역 6월
安樂淳(順) 44세 농업 수원군 성호면 세교리 징역 6월
金用俊 38세 농업 수원군 성호면 금암리 징역 6월
주모자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며 나이는 다양하지만 성호면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의 과격한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는 징역 6월과 1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했다. 성호면 오산리의 만
세운동은 처음에는 학생들과 천도교도들이 주축이 되었고, 이후에는 오산시장에서의 농민과 상인들
이 중심이 되어 오산지역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벌인 만세운동이었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배경으로는 교육적 환경을 들 수 있다. 오산리에는 일찍부터 학교가 설립되었
는데 사립으로 신명학교(新明學校)가 있었다. 일제는 이 학교를 폐쇄시키고 1913년 4월 1일 오산공립
보통학교로 수원군수를 설립자로 하여 개교시켰다. 당시 수원군에는 수원공립보통학교와 오산공립
보통학교 두 개의 공립학교와 사립 진명학교, 삼일학교, 삼일여학교의 3개의 사립학교, 그리고 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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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개소가 있었다. 수원면과 성호면 오산리에 각각 공립보통학교가 타 지역 보다 일찍부터 존재한
것은 교육열이 높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흐름은 다음 장에서 서술할 청년운동의 활동에서도
교육운동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민족교육운동은 수원군 내에서도 3·1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의 하나였다. 민족교육운동은 사립학교의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수원군에
서는 1910년을 전후하여 사립학교의 설립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서당과 함께 사립학교, 사숙들은 국
어와 한문, 일본어 그리고 역사까지도 가르쳤다. 또한, 천도교도 전교실과 강습소를 통하여 교리뿐만
아니라 근대적 지식과 교양을 가르치며 민족교육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산지역 만세운동의 또 다른 배경으로는 천도교의 교세를 들 수 있다. 수원군의 천도교 교세를 알
수 있는 1926년의 「수원군종리원연혁(水原郡宗理院沿革)」을 보면 수원교구 산하 15개 면에 전교사(傳
오산시사 敎師)와 종리사(宗理師)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중 성호면은 세교리와 오산리로 나누어
져 세교리에는 전교사로 홍재범(洪在範), 이병인(李秉仁), 홍종각(洪鍾珏), 최영선(崔永善), 홍종국(洪
鍾國), 이연숙(李演鷫), 유진철(兪鎭哲)이, 종리사는 홍종각(洪鍾珏)이 담당하였다. 오산리에서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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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교사로 송종수(宋鍾洙), 엄운보(嚴雲輔), 차재윤(車載崙), 임영식(林永植), 이정우(李正雨), 송종면(宋
214 36) 酒井政之助, 『發展せる 水原』, 1914, 17~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