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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수원청년동맹의 임시대회가 끝난 뒤 오산청년동맹은 곧바로 해체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공석
                  정의 사회로 수원청년동맹 성호지부(城湖支部)가 창립되었다. 이것은 오산청년동맹이 수원청년동맹

                  을 발족하고 그 산하의 지부로 재편된 것이었다. 성호지부의 집행위원장은 변기재가 맡았고, 집행위
                  원은 박정오(朴正吳), 이덕만(李德萬), 박을룡(朴乙龍), 김오룡(金伍龍), 엄영득(嚴英得)이 임명되었

                  고, 검사위원은 공건수(孔建洙)가 맡았다.            50)
                                                          51)
                    오산청년동맹이 수원청년동맹 성호(오산)지부 로 재편된 후 성호지부는 변기재가 중심이 되었다.
                  변기재는 박승극의 지도를 받으며 수원청년동맹 성호지부를 이끌어 갔다. 이후 성호지부에는 자본주
                  의제도의 타파와 공산사회수립을 목적으로 한 단결을 위하여 조명재, 이원식, 이수경, 이성모, 박부

                  산 등이 지부집행위원으로서 추가 가맹하였다.               52)
                    결과적으로 오산청년동맹이 양감면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승극 등을 합류시켜 수원청년동맹을 창

                  립하고 동시에 그 산하의 성호지부로 재편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수원청년동맹의 모체가 오산청
                  년동맹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수원청년동맹은 박승극과 공석정 등의 사회주의자들이 식민지배하에서 절감했던 새로운 사회주의
                  청년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래서 수원청년동맹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청

                  년 대중의 의식적 교양과 훈련의 철저를 기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견고한 조직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후 박승극, 공석정의 지도 아래에 수원청년동맹은 수원군내의 사회단체와 청년단체를 대표하며 활

                  동을 벌여나갔다. 수원청년동맹은 회원제로 운영하였는데, 회원가입비인 가맹금(加盟金)을 10원씩
                  받고 봄과 가을에 기성회비와 함께 후원금 등을 받아들여 조직을 운영했다. 수원청년동맹의 주요 역

                  원은 박승극을 비롯하여 박해병(朴海秉), 장주문(張柱文), 변기재, 이용성(李容成) 등이 꾸준히 중요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초반 수원청년동맹은 회원이 95명에 산하에 3개의 지부를

                  두게 되었다. 지부는 성호지부와 양감지부, 수원지부였다.                  53)
                    수원청년동맹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은 성호지부였다. 수원청년동맹이 결성되자마자 조

                  직된 성호지부는 수원청년동맹의 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에 조직되는 지부에 비해서 직접적인
                  활동들이 많이 펼쳐졌다. 수원청년동맹 성호지부는 1929년 7월 18일 오산리 회관에서 제1회 임시대

                  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신입 맹원의 소개와 경과보고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제4회 기호
                                                    54)
                  소년 정구대회에 관한 토의 등도 있었다.  그리고 성호지부는 신간회수원지회 성호분회와 연합위원
                                                                                             55)
                  회를 갖기도 했다. 이들 양 단체는 상식강좌를 함께 열고 연합회관의 건축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8


      오산시사
                  50) 『朝鮮日報』 1929년 6월 12일 .
                  51) 당시 성호지부의 중심이 오산리였기에 오산지부로도 불렸다. 이 글에서는 이후부터 원래 명칭인 성호지부로 쓰고자 한다.
                  52)  『思想에 關한 情報(4)』 「勞農學院赤化事件 檢擧에 關한 件」水警高秘 제3709호, 1932년 9월 11일 : 『思想에 關한 情報(4)』 「勞農學院赤
      제              化事件 檢擧에 關한 件」京高秘 제5746호, 1932년 9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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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53)  『昭和 9年 3月 治安情況』 「各種運動情況, 昭和 7年 下半期後의 重要事件 檢擧, 勞農學院赤化事件 檢擧」「附表, 重한 團體表」, 1934年
                     ; 수원청년동맹은 다음을 목적으로 했다. 一, 朝鮮 靑年 大衆의 政治的 經濟的 利益 獲得을 期함, 一, 朝鮮 靑年 大衆의 意識的 敎養
                     및 訓練의 徹底를 期함, 一, 朝鮮 靑年 大衆의 鞏固한 組織의 完成을 期함, 그리고 사무실은 水原郡 水原面 山樓里 101번지에 두었다.
                  54) 『東亞日報』 1929년 7월 24일 .
    218           55) 『朝鮮日報』 1929년 8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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