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鴻), 조사부에 황응선(黃應善)이 임명되었다. 68)
오산지역의 사회주의 청년들은 신간회 활동뿐만 아니라 수원노동조합의 활동도 수행하였다. 1929
년 1월 수원인공친목회(水原印工親睦會)가 화성학원에서 제6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수원의 노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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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을 확대시키고 조직적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수원노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수원노동조합은 원산
대파업이 일어났을 때 금주금연운동을 펼쳐 그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70)
일제는 당시 사회주의 청년운동 단체들에 대해 집회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집회가 금지
되었는데 신간지회대회, 신간지회의 각반총회, 노동조합의 집행위원회, 확대위원회, 청년동맹 각지
부위원회를 비롯하여 청년동맹양감지부설치대회 등이 금지를 당했다. 또한, 소년동맹의 5·6차의
집행위원회와 동화대회 등도 금지되었다. 71)
하지만 이러한 탄압의 조건에서도 1930년 3월 26일 언론의 자유와 여론의 민중부합을 위한 수원
기자동맹(水原記者同盟)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수원군에 있던 중외일보(中外日報), 조선일보(朝鮮日
報), 동아일보(東亞日報) 지국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열린 대회였다. 우성규, 박승극, 공석정, 변기재,
박선태 등이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강령을 통하여 언론의 권위획득과 여론의 민중부합, 행동의 일치
단결을 도모했다. 그리고 집행위원장으로 우성규, 집행위원으로는 민홍식(閔洪植), 박승극, 윤택영
(尹宅榮), 김병호(金炳浩), 검사위원장으로는 박선태, 공석정, 변기재를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사무소
는 동아일보 수원지국을 임시로 사용하기로 하고, 중요한 의제로 제1회 ‘경기남부기자대회’ 소집에 관
하여 논의하였다. 경기남부기자대회는 그해 4월 19일, 20일 양일간 수원군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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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대회는 수원공회당에서 열기로 하였다. 참가자격은 경기도 내의 중외일보, 동아일보, 조선
일보 각 지국의 기자들이었다. 먼저 대회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수원 성내의 신풍리에 있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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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자동맹사무소에 신청을 하게 했다. 이 대회의 근본 목적은 일제의 언론 탄압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수원기자동맹의 대회는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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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찰부에 의해 갑자기 금지 조치되었다. 이에 수원기자동맹은 집행위원회를 열고 경기도경찰부
에 대한 탄압을 논의하는 한편 제1회 ‘경기남부기자대회(近畿記者大會)’를 5월 25, 26일로 연기하였
다. 75)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지속되었다. 일제 경찰은 돌연히 아무런 물증 없이 수원기자동맹위원장 박
승극과 공석정을 체포하기도 하였는데, 프로예술동맹의 미술전람회에 선전선동이 있었다는 막연한
오산시사
68) 『朝鮮日報』 1929년 8월 15일 .
69) 『朝鮮日報』 1929년 1월 6일 ; 임원구성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崔水億, 부위원장 李台衡, 집행위원장 林凡辰, 위원 曹千福, 車載成, 朴
慶學, 金永和, 李鍾和, 劉舜鍾 .
제 70) 『朝鮮日報』 1929년 2월 7일 .
2 71) 『朝鮮日報』 1930년 2월 19일 .
권
72) 『朝鮮日報』 1930년 3월 29일 .
73) 『朝鮮日報』 1930년 4월 15일 .
74) 『朝鮮日報』 1930년 4월 20일 .
222 75) 『朝鮮日報』 1930년 5월 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