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6 - 제2권
P. 226
91)
는 1933년 1월에 판결을 받고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나머지 박정오(26세), 이수경(28세), 황
경후(24세) 이성모(27세), 박부산(24세)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92)
수원청년동맹 성호지부 교양부의 사업으로서 운영된 오산노농학원은 사회주의 사상교육에 중점
을 두고 사회주의 계급의식의 함양을 위해 『노동독본』, 『노동산술』, 잡지 『별나라(星의 國)』, 『조선농민
독본』 등을 교과서로 사용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모순의 실례를 들어가며 교육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현실의 문제를 습자하는 교육방법을 활용하였다. 이것은 식민지 현실을 인식하기 위한 실질적
교육이기도 했다. 교사 이원식이 학생들에게 등사하여 건네준 통신을 보면,
통신부
일, 우리들은 항상 의리 있는 진실한 동지가 되자.
이, 우리 학원의 동지들은 가난한 동지인 것을 잊지 말자.
삼, 우리들의 견실은 배움에 있다.
사, 우리들은 지금 적은 시간을 아까워하고 따라서 종소리가 나기 전에 모이자.
오,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라면 동지를 위해 하는 것임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자. 93)
계급적 차별에 대한 동지의식을 강조하며 배움을 독려하고 있는 내용이다. 또한, 교사 이성모, 조
명재 등이 사회주의 잡지 등에서 내용을 뽑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내용들은 학생들이 습자한 다음의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평양의 평원호막공장의 여직공들은 봉기하여 큰 소요를 일으켰다. 공장의 주인은 술을 넘치
게 마시고 견직(絹織)을 입고,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면서 돈벌이가 적은 날은 여직공의 임금
을 감하였다. 우리들이 안전하게 생활해 가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
리들이 생활해 나가는 길은 막연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활이나 모든 것이 현재에 있어서
우리들의 부모의 죄로서 투쟁력과 함께 기분이 축소되고 있다.
제3년생 강금순
우리 조선은 재래의 습관에 의해 아직도 양반상민의 차별 관념이 있다. 그래서 우리 무산농
민 노동자는 이 모순 된 습관을 타파하여, 상호 동등함을 주장하며 모든 어떤 일도 묻지 않고
오산시사 반드시 우리들은 무산자를 위해 움직이자.
제
2
권 91) 「邊基在 判決文」, 1932年 刑控第519號, 京城覆審法院, 1933년 1월 23일 ; 변기재는 이후 1934년 4월 1일 대전형무소에서 만기출옥하였
다.(『조선중앙일보』1934년 4월 8일) .
92) 『昭和 9年 3月 治安情況』 「各種運動情況, 昭和 7年 下半期後의 重要事件 檢擧, 勞農學院赤化事件 檢擧」「附表, 重한 團體表」, 1934年 .
226 93) 『思想에 關한 情報(4)』 「勞農學院赤化事件 檢擧에 關한 件」水警高秘 제3709호, 1932년 9월 11일 : 『思想에 關한 情報(4)』 「勞農學院赤
.
化事件 檢擧에 關한 件」京高秘 제5746호, 1932년 9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