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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성호면 오산리 221
◇ 細橋班 역사
구역 台章面 성호면 북부 正南面 / 유적
일자 1월 2일
장소 성호면 세교리 光成學院 · 유물
◇ 長安班
구역 長安面 雨汀面전원
일자 1월 10일
장소 장안면 漁隱里
이미 공석정과 박승극이 나름대로의 청년회 조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던 양감면과 성호면이 중심
이 되어 반이 조직되었다. 이후 실질적으로 신간회수원지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곳도 이곳이었다.
신간회 수원지회 오산반은 노동자들의 파업 등에도 관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29년 3월
경기도가 빈민구제방침으로 동탄면과 성호면의 오산천 개수공사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3
백여 명이 파업을 단행하였는데, 이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노동자들
은 기존 노임을 평균 70전에서 30전으로 낮추어 지급하는 열악한 조건에 대해 항의하였다. 이때 신
간회 수원지회의 오산반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의 노임을 매평 1원으로
인상케 한 후 노사간 정확한 규범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매일 오산반 간사 일동이 공사장에서 공사현
황을 감시하며 공사를 재개시켰다. 65)
당시 박승극과 공석정의 주도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지부도 조직되었다. 일제의 탄압
은 이 단체에도 이어졌는데, 수원경찰서에서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지부의 규약을 압수
66)
하고 박승극을 소환하였다. 이유는 규약을 출판허가를 받지 않고 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지부는 이러한 상황에도 창립기념문예 강연회를 1929년 5월에 개최
하였다. 수원공회당에서 개최된 강연회에는 많은 이들이 모인 가운데 ‘근대문예사조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박팔양(朴八陽)이 강연하고, ‘우리 오빠와 하루’라는 제목의 시를 임화(林和)가 낭독하였다.
그리고 ‘당면의 예술활동’이란 제목으로 윤기정(尹基鼎)이 강연하였다. 하지만 이날의 강연도 일제 경
관의 감시와 방해로 예정된 강연의 일부가 금지당했다. 또한, 폐회사에 들어가서는 공석정이 열변을
67)
토하다가 임석해 있던 일제 경관으로부터 중지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1929년 8월 12일에 조선프롤
레타리아예술동맹 수원지부는 정기대회를 수원면 산루리 노동조합회관에서 개최한 뒤 수원지부의
집행부를 조직하였다. 위원장에 박승극, 서무부에 권순증, 교양부에 공석정, 조직부에 엄익홍(嚴翼
65) 『朝鮮日報』 1929년 4월 25일 .
66) 『朝鮮日報』 1929년 5월 10일 .
67) 『朝鮮日報』 1929년 5월 1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