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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조건 속에서도 짧은 기간이나마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225
                    당시 오산에서도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문자보급반 활동이 진행되었다. 1929년 7월경부터 연희                                          역사

                  전문학교생이었던 이성모(李聖模)와 실업전수(實業專修)학교의 황경후(黃慶厚) 등이 중심이 되어서                                             /  유적
                  조선일보사 주최의 문자보급반을 오산리에 설치하고 무산아동 60명을 민가에 모아 놓고 야학을 실

                  시하였다. 그러나 일반 가옥을 빌려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임대료가 체납되고, 이성모와 황경후 등                                           · 유물
                  이 학생으로서 일본유학을 결심하는 등 문자보급반 활동은 단기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을 오산지역

                  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인수하여 명칭을 노동야학으로 바꾸고 오산리의 유길동(兪吉童)과 박달순(朴
                                                87)
                  達順) 집에서 2조로 나누어 변기재,  이원식, 조명재, 황경후, 이수경 등이 교사로 활동하면서 운영
                  하게 되었다. 그 후 노동야학은 오산사회단체연합회관으로 이전하여 노농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전의 문자보급반의 활동이 단순한 한글 교육과 보급에 있었다면, 노농학원으로의 개편과 운영은

                  수원청년동맹 성호지부의 사업으로 무산아동들에 대한 철저한 사상교육으로 이어졌다.
                    수원청년동맹 성호지부는 1930년 3월 20일 오산리 사회단체 연합회관에서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

                  다. 이 위원회에는 변기재, 이성모, 박정미(朴正美), 박부산(朴富山), 조명재, 이원식, 이수경의 7명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명재는 기존에 오산리에 개설되어 있었던 노동야학을 오산지부에서 인수

                  하여 경영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공산주의 실현의 수단으로서 야학에서 무산농민 및 노동자의
                  자제를 교육하여 어릴 때부터 공산주의적 교양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계급투쟁 의식을 주

                  입시켜 공산주의운동의 투사를 양성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변기재는 그 계획을 1930년 3월 30일 오
                  산지부의 정기대회에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회의에 참석한 20여 명 전원이 의결하여 노동야학을 인

                  수하여 경영할 것을 결정하였다. 마침 오산사회단체연합회관이 신축되고 있어 그곳을 교육의 장소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은 곧바로 수원청년동맹 성호지부의 주요한 사업이 되었다.                              88)

                    하지만 이런 비밀활동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1932년 8월 관련자가 모두 검거되
                  었다. 일제 경찰은 변기재의 가택을 수색하여 각종 사회주의 출판물을 압수하고 변기재, 조명재, 이

                  원식, 박정오, 이수경, 이성모, 박부산, 황경후 등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배후를 수원청년동맹 집행위
                  원장이었던 박승극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박승극은 이미 ‘수진농민조합사건(水振農民組合事件)’으로

                  검거되어 예심계류 중이었다. 이에 일제는 성호지부장이었던 변기재를 비합법 단체인 오산노농학원
                  책임자로 파악했다. 그리고 오산노농학원을 자본주의제도를 파괴하고 공산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무

                  산아동에 대해 공산주의적 계급의식의 교양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89)
                    오산노농학원 사건으로 검거된 변기재 등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90)
                  으로 송치된 뒤 조명재(29세), 이원식(30세)은 각 1년 6월, 1년 2월의 판결을 받았고,  변기재(29세)




                  87)  당시 변기재는 조선일보 오산지국장을 역임하고 있었고 박승극도 조선일보 수원지국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일보사의 후원이 있었
                    을 것으로 짐작되며 야학의 인수과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88) 「邊基在 判決文」, 1932年 刑控第519號, 京城覆審法院, 1933년 1월 23일 .
                  89)  『思想에 關한 情報(4)』 「勞農學院赤化事件 檢擧에 關한 件」水警高秘 제3709호, 1932년 9월 11일 : 『思想에 關한 情報(4)』 「勞農學院赤
                    化事件 檢擧에 關한 件」京高秘 제5746호, 1932년 9월 14일  .
                  90) 『東亞日報』 1932년 12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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