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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상 황경후(20세)
이, 검거의 동기
1930년 3월 수원청년동맹 오산지부 정기대회 이래 노농학원은 동지부 교양부의 사업으로서 경영하기에 이르렀
다. 교사도 이같이 동지부의 집행위원으로서 어느것이나 동지방에서는 색채가 가장 농후한 주의자들로서 관할서
에서도 이들의 행동에 대해 엄중사찰에 힘쓰고 있는 중 작년 9월에 동학원운동회에서는 ‘소비에트 마크’가 들어간
붉은색 기를 만들어 이를 학동에게 들게하여 시위운동에 나서게 한 사례가 있다. 또 학동에 대해 최근 비합법 출
판물을 교견으로서 투쟁의식의 교육훈련을 실시하여 장래의 전위분자 양성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들어알고 있다.
검거의 기회를 고려 중에 처우 오산지방에서는 주의운동의 리더로써 예상되는 주의중인 변기재는 8월 초순 비합
법 출판물 ‘노동계급’을 입수하여 조명재 이원식 등의 노농학원 교사로 이를 연구하여 학동에 대한 의식 주입의 자
재로 제공하고자 획책중인 뜻을 탐지한 것으로서 8월 3일 변기재 집을 수색하니 공산당선언, 프로레타리아 카툰
만화집, 전농뉴스(토지와 자유) 등의 비합법 출판물을 그들이 머물던 집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곧바로 신병을 동행
하여 엄중 취조를 하였는데 공산당선언, 프로레타리아카툰 만화집은 1930년 7월경 동경의 좌익서방에 주문해서
입수하였고 프롤레타리아 카툰 만화집은 투쟁 전술로서 전단에 뉴스 아지비타 등을 작제상 필요한 것으로서 구입
하여 이미 1931년 9월 노농학원의 운동회 즈음에서는 그 프롤레타리아 카툰 만화집을 응용한 아지비라 혹은 소비
에트 마크가 들어간 적기 등을 만든것과 나란히 자기는 1930년 3월이후 노농학원 책임자로서 수원청년동맹 오산
지부 집행위원 조명재 동 이원식 동 박정오 동 이수경 동 이성모 동 박부산 및 황경후 등과 상의하여 장래의 사회
혁명의 투사를 양성하고자 한 뜻을 자백한 것으로서 본건 검거의 단서를 득한 자들임.
삼, 범죄사실의 개요
1. 수원청년동맹 오산지부의 조직
변기재는 1915년 오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가사의 형편에 의해서 중도 퇴학
하여 일시 오산의 자신의 태어난 집에서 가사의 수전을 위해 있었는데, 1926년 7월 고학의 목적으로서 동경에 가
서 신문배달 등을 하던 중 교우 등의 영향에 의해 사상이 점차 좌경화하여 그 후 조선으로 돌아와 1928년 4월 오
산에서 조선일보 오산지국을 경영하는 한편 환성운송 점원으로서 한때는 상당한 진면목인 생활이 복귀되어진 것
1929년경부터 다시 공산주의자 수원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박승극 동 집행위원 공석정 등과 교유하여 일면 좌익서
적을 섭렵하는 중 현재의 사회제도에 불만을 지니고 공산사회의 실현을 몽상하기에 이르렀다. 동년 6월 9일 박승
극은 공석정과 서로 모의하여 신간회수원지회 오산반사무소에서 수원청년동맹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동시에
오산청년동맹을 해체하고 수원청년동맹성호(오산)지부를 조직하고 변기재를 그 집행위원장으로 추거하였다.
그후 변기재는 박승극 지도 아래 수원청년동맹오산지부인 합법단체의 이면에 은밀한 사실상 현재의 자본주의
오산시사
제도를 파괴하여 공산사회수립을 목적으로한 비합법 단결하기위하여 조명재 이원식 박정오 이수경 이성모 박부
산 모두 좋은 뜻으로 알고 동 지부집행위원으로서 가맹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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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2. 노농학원의 경영
전기와 같은 노농학원은 1929년 8월 조선일보사 오산지국 변기재의 제창에 의해 동사 주최의 문자보급반을 그
전신으로 한 것인데 공산혁명의 야망을 품고 수원청년동맹 오산지부의 간부에 있어서는 장래의 혁명투사를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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