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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우리들은 지금 적은 시간을 아까워하고 따라서 종소리가 나기 전에 모이자. 233
오,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라면 동지를 위해 하는 것임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자. 역사
제3호 / 유적
(노농학원 아동연습장 수기의 일부) · 유물
평양의 평원호막공장의 여직공들은 봉기하여 큰 소요를 일으킨 공장의 주인은 술을 넘치게 마시고 絹織을 입
고,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면서 돈벌이가 적은 날은 여직공의 임금을 감하였다. 우리들이 안전하게 생활해 가려 한
다면 무엇보다도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생활해 나가는 길은 막연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활이나
모든 것이 현재에 있어서 우리들의 부모의 죄로서 투쟁력과 함께 기분이 축소되고 있다.
제3년생 강금순
제4호
우리 조선은 재래의 습관에 의해 아직도 양반상민의 차별의 관념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 무산농민 노동자는 이
모순 된 습관을 타파하여 상호 동등함을 주장하며 모든 어떤 일도 묻지 않고 반드시 우리들은 무산자를 위해 움직
이자.
제3년생 양용성
● 『昭和 9年 3月 治安情況』「各種運動情況, 昭和 7年 下半期後의 重要事件 檢擧, 勞農學院赤化事件 檢擧」
(1934년)
八, 勞農學院赤化事件 檢擧
사건의 개요
관하 水原郡 城湖面 烏山里 소재 書堂 烏山勞農學院(무인가)은 1929년 8월 朝鮮日報 烏山支局長 요주의 인물
邊基在에 의해 同社의 소위 文字普及班으로서 설치되어진 것인데 동년 9월 경 으로부터 主義的 色彩를 띠게 되
어 그 명칭도 勞動夜學으로 개칭하였는데 다시 익 5년(1930년) 3월 水原靑年同盟 烏山支部의 경영에 옮겨 勞農
學院으로 개칭한 것으로 이와 함께 더욱 左傾化 되기에 이름으로써 관할 水原署에서는 엄밀 내사 중 우연히 1932
년(소화7) 8월 초순 전기 邊基在는 비합법출판물인 잡지 ‘勞動階級’을 입수하여 勞農學院 교사 등과 몰래 연구하
고 있다는 뜻을 듣고 알아서 동월 3일 관할 서원으로서 그 가택을 수색하였는데 共産黨宣言, 프롤레타리아 카툰
漫畵集, 뉴스, 檄文 등 다수의 비합법출판물을 발견하고 곧바로 이를 압수함과 함께 身柄을 동행하여 엄중 취조한
바 本名 등은 曩 이전에 수원서에 검거 송국된 水原靑年同盟 執行委員長 朴勝極의 지도를 받았으며 1929년 6월
水原靑年同盟 烏山支部를 조직하여서 그 執行委員長이 되었다. 이면 비밀리에 同支部를경영한 勞農學院 책임자
가 되었다.
현재의 資本主義制度를 파괴하고 共産社會를 실현하기 위한 一段階로서 無産兒童에 대해 共産主義的 敎養訓
練을 하고 있었다는 뜻을 자백함으로써 곧 관계자를 일망타진 검거하고 취조한 바 모두 邊基在 지도하에 그 목적
을 의식하여 勞農學院 生徒에 대해 共産主義 교육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됨으로써 治安維持法 違反으로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