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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6월 오산우편수취소가 오산역 앞에 문을 열어 우편저금과 집배사무를 취급하였는데, 이것
은 실제적으론 오산지역에 대한 자본주의 침략의 통로가 되었다.
1906년 9월 일제는 성호면에 일본인 자제를 위한 초등교육기관의 문을 열었다. 한반도로 일본인
이주를 장려하면서 제일 먼저 교육기관을 세운 것이다. 일본이 한국인을 위한 공립학교를 세운 것이
1913년이므로 7년 전에 일본인 아동을 위한 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1912년 오산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총 62호 248명이, 한국인은 1,863호 7,339명이었다. 일본인
은 오산역이 있는 청호면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면서 이주 초기 단계를 시작하였고, 오산지역에 일본
인회가 조직된 것이 1911년이다.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소멸하고 일제강점이 시작되기 전에 오산지역에 진출하여 일본인학교
(소학교)의 문을 열었고, 오산을 일제문화로 오염시키기 시작하였다.
일제 침략에 맞서 오산지역의 교육을 이끈 세력은 사립학교 교육운동가들이었다. 1904년 오산지역
의 유림 조병식 등은 중국 산동성의 공자 성적도를 오산화성궐리사에 모셨다. 이것은 내우외환의 민
족사가 당면한 위기를 전통문화를 재현함으로써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오산화성궐리사는 정조임금이 1792년 공자영정을 봉안하는 곳으로 사액함으로 오산지역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오산의 사람들은 1894년 오산화성궐리사 옛터에 설단을 복원하고 1900년 오산화성
궐리사를 중건함으로 권학을 격려했다. 1904년 도약장을 역임한 오산 유림 조병식 등 7인은 산동성
의 공자행적을 그린 성적도를 오산화성궐리사에 옮겨 제작함으로서 유교적 전통문화로 자본주의 제
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정신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외세로부터 우리를 지키고자 한 유림들의
노력이었다. 영친왕의 스승이었던 심주택은 1907년 당촌 본가 사랑채에 서당을 세워 역촌동, 우촌,
부산동, 고현동 일대의 자제들에게 근대교육의 문을 열기도 했다.
1907년 오뫼(오산)교회는 오산 최초의 감리교회다. 교회 안에 오산 최초 남녀 교육기관인 초등학교
를 열었으며 1912년 성호면에는 교리종합강습소가 열려 교리강습이 시작되었다.
애국계몽운동, 교육운동과 함께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오산지역에서 의병들의 활동은 드높았다.
의병활동 중 큰 사건만을 살펴본다면, 1907년의 오산역습격사건, 1908년 3월에는 원동 일본인 마을
을 습격하여 일본인을 살해하였고, 이러한 사건들은 1909년 문시면의 의병장 안춘경이 체포될 때까
지 계속되었다. 오산지역 의병의 특징은 1907년 군대 해산 후 수원 진위대의 병사들과 함께하여 수원
지역 일진회의 수령을 처단하기도 했으며, 용주사를 점령하고 철도선로를 파괴하거나 남양지역과 대
부도 등 인근 도서로 진출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수원, 광주, 용인지역 의병과도 서로 연합하여 활동
오산시사 하였다. 의병 10명이 일본군 1명을 이기지 못하는 빈곤한 무장력이었지만, 민중들에게 철저한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킨 점에서 민중운동사에서 가장 뛰어난 운동으로 평가된다.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오산정미소, 오산우편소, 오산농업실수학교, 오산금융조합 등 근대성을 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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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많은 기관을 오산지역에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것이지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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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혹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본자본의 성장이었지 한국
인을 위한 산업의 성장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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