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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해방 직전까지 오산지역의 전체 인구는 9천 명을 넘지 못했다.
오산3·1독립만세운동 이후 오산지역의 민족운동 사회운동의 주체는 청년층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대 초반부터 전국적으로 청년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오산지역의 청년운동은 지역유지들과 젊
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지역유지들은 계몽적 성격의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신간회 오산지
부를 설치하면서 오산지역 내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반면 젊은 청년학생들은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적극적인 사상단체를 만들었다.
수원군에서 최초로 사상단체가 태어난 곳은 성호면 오산리였다. 첫 등장한 사상단체는 혁성단이
다. 동아일보의 「수원청년부활」이란 기사에 의하면 혁성단은 15명의 단원으로 오산에서 조직된다. 또
한, 그 이후 오산에서는 또 다른 사상단체인 오산살청년동맹이 조직되었다. 오산살청년동맹은 성호
면 오산리에 있던 갑자단과 초화청년회가 1927년 초 합동하였다고 한다. 이 단체는 김기선이 회장이
며 회원은 40여 명이었다. 사업으로는 무산아동교육기관 대성학원을 운영하였다.
1925년 사회운동상황을 보면 사립 광성학원이 세교리에 개원했고, 광성학원은 민족진영의 후원을
얻고 운영되었다. 오산대성학원은 낙성식 겸 학예회를 개최하였고 오산감리교회는 “국가는 문화발전
에 있느냐? 기능발휘에 있느냐?”를 가지고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9월에는 동아일보 오산 독자는 이
발료 5원을 할인한다는 친목운동도 있었으며 성호면에 광활청년회가 창립되었다.
1925년 당시 오산지역에 지세 부담율은 일본인이 9할이고 조선인이 1할이었기 때문에 토지소유권
은 일본인이 80% 이상을 보유한 흔적이 보인다. 청년들의 구호는 “빈민을 구하라.”였다.
오산·병점축구시합 수원용맹단 주최 마라톤대회, 궁술대회, 무도대회, 자전차대회 등이 개최된
것을 보면 사회 경제적 처지는 어려웠으나 민족운동, 사회운동 세력들이 결집 되고 크게 활동력을 발
휘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1926년 6·10만세 사건을 계기로 수원농고에서는 크게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 영향으로 오산공
립보통학교와 오산공립농업보습학교 학생들은 맹휴를 일으켜 무자격 일인교사를 배척하고 동맹휴학
과 무기정학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민족의식이 고양된 새 시대의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오산부녀야학, 금주강연회 등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민족진영과 사회주의 청년단체는 열성으
로 힘을 합쳤다. 오산지역에서 소작인이 고율소작료 때문에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청년단체는
성호면 소작인 소작료 인하운동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오산대성학원의 공석정, 류기현, 이봉의 등
증건회 간부들이 검속되었다.
오산지역에서 일본인이 관장하는 곳은 오산역 주변이었고, 동아일보·조선일보 양 지국은 오산
오산시사 청년동맹과 함께 오산 전 지역을 관장하였다. 농민, 청년, 민족언론, 민족주의 교육기관이 힘을 합
치자 소작농들도 용기를 얻어 사음(마름)집에 찾아가 소작권을 무리하게 박탈당한 일에 대해 담판
을 벌이고, 오산 성호면 소작인 이름으로 쟁의를 전개하였다. 소작인들이 소작권 불납운동과 소작
제
2 료 인하 요구를 할 수 있음은 민중들의 생존권 각성과 자본주의 침탈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시작했
권
음을 보여준다.
성호면 벌음리에 인접한 불량 전답 50여 정보를 소작하던 농민들은 면세조치를 당국에 진정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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