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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운동을 주도하는 운동본부로 등장하였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8일 자 기사에 의하면 수원에는                                        241
                  지국이 있었고, 이천·안성·평택·용인에는 분국, 오산에는 수원지구분매소(分賣所)가 있었다. 수                                            역사

                  원군 융내면 남수리에 있었던 지국에는 지구장, 총무 겸 기자, 기자 등으로 임원이 배치되고, 분국에                                          /  유적
                  는 분국장과 총무 겸 기자가 활동하였는데 오산분매소에는 주무 심상갑이 파견되었다. 민족지 동아

                  일보, 조선일보 분매소는 신문을 보급하는 일뿐만 아니라 오산지역의 청년운동단체, 사회주의운동단                                            · 유물
                  체들과 함께 애국계몽의 청소년 운동에서부터 소작쟁의 노동쟁의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산실이

                  되었다.
                    오산3·1독립만세운동 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천주교는 오산지역의 2곳에 신앙공동체를 세

                  웠다. 성호면 세교리공소와 벌음리공소에는 천주교신앙을 의지하여 민중들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기독교세력이 자리잡았다.

                    개신교세력도 수원금주회를 창립하여 금주·단연운동을 벌였으며 물산장려운동과 병행하여 민족
                  경제자립운동에 매진했다. 수원청년회구락부에서는 수원유년부야구단 용맹팀과 오산유년팀과 야구

                  시합을 개최하였고, 정구시합, 축구시합을 개최했다. 경성통학생팀, 오산지역팀, 경성교보축구단,
                  수원학생친목팀 등이 참가하여 청소년의 힘을 배양시켰다.

                    일제는 오산지역에 양잠조합을 설치하고 수원·천안 간 전화선을 증설하는 한편, 미곡수확고를 25
                  만 석으로 집계하면서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근대화 정책은 수탈이 목적

                  이었지 오산지역 농민들을 위한 정책은 아니었다.
                    1920년 9월 천안전등주식회사 오산출장소가 설치됨으로 일본인 위주로 오산지역에 전기 보급이

                  일반화되어갔다. 1920년대 중반 수원장은 규모가 커졌으나, 오산장은 성장이 중지되고 거래물품도
                  곡물거래가 중심을 이루었다. 경제의 중심이 수원으로 옮겨졌다. 1926년 통계에 의하면 오산장의 연

                  간 거래 액수는 24만 원이었고 하루 평균 구매자는 800명인데 비하여 수원 북수리 시장은 연간 40만
                  원, 하루 평균 구매자는 1,500명에 이르렀다. 1917년 당시 성호면 오산장(음력 3일, 8일)은 연간 거래

                  액수가 17만4천 원이었고, 수원성내장(음력9일), 수원성외장 (음력4일)은 평균 16만5천 원이었다. 오
                  산장은 남양장, 발안장, 반월장, 사강장 및 수원성 내·외장을 모두 포함하여 가장 거래 규모가 큰 장

                  이었으나,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는 점차 쇄락의 길을 걸었다. 오산장의 장점은 삼남
                  으로 오고 가는 길목에 있었고, 서울로 가는 물산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1923년 성호면의 전체 인구는 8,508명이었다. 1925년 성호면의 전체호수는 1,549호였다. 이러한
                  인구통계는 1914년 성호면이 탄생하였을 때 총 호수 1,447호, 인구 7천 내외에 비하면 전혀 증가하지

                  못한 추세다.
                    1922년 성호면의 농가호수 중 지주 갑(甲)은 없고, 지주 乙은 30호, 자작농은 86호, 자작 겸 소작

                  405호, 소작농 535호라는 통계로 볼 때 소작농은 전체의 87%에 속하고 자작농과 지주 을은 일본인
                  이 대부분이었고 한인들은 소수였다.

                    1928년 11월 18일 오산지주회가 한 해 대책협의를 위하여 모였을 때 지주 민광식, 최윤 외 50명이
                  모였다는 기록을 보면, 오산지역은 소규모의 자작농과 대다수의 소작농으로 구성 비율을 이루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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