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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야만적인 민족말살정책, 수탈정책과 헌병경찰제도에 맞서 친일파와 지주를 제외한 오산지

                  역의 광범위한 군중들은 민족해방에 대한 염원과 반일감정에 불타고 있었다. 오산지역의 3·1독립만
                  세운동은 3월 14일 시작되어 3월 25일, 29일, 30일 오산장에서 시작하고 독산성에서 끝났는데, 그중

                  에서 가장 크게 시위가 있었던 날은 3월 29일(음력 2월 28일) 오산장 시위이다(당시는 음력 3일·8일
                  이 들어가는 날에 장이 섰다).

                    3월 14일 성호면 오산리에서 최초 시위운동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제의 경계로 거사되지 못하였
                  다. 그러나 수원 등 주변에서 만세시위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3월 25일 오산 보통학교 졸업생과 식장

                  에 참가한 천도교인들이 일본인과 중국인 가옥과 금융조합을 파괴하였다. 다음날에는 일본인 거주
                  지역에 2건의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3월 29일 장날을 맞아 성호면 세교리에 안낙순과 오산리의 유진

                  홍이 앞장서고 오산장에 온 장꾼들이 오후 서로 합세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2백여 명의 시위
                  주도세력들이 시장 서북편에서 밀려 내려오자 장날 시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합세하고 시위가 계

                  속되는 동안 저녁에는 800여 명으로 증가되었다. 오산장에서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로 나아가 독
                  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병헌의 기록에는 떡장수, 엿장수도 춤을 추며 독립시위에 가담했다고 증언

                  한다. 일형면 조원리의 이성구, 성호면 오산리의 김경도, 진위 북면 봉담리의 이규선, 오산리의 정규
                  환, 성호면 금암리의 김용준, 성호면 궐리의 공칠보 등은 모두가 농민이었다. 3월 29일의 오산장 시

                  위는 3월 30일 독산성에서도 지속되었다. 오산장시위는 장꾼과 농업에 종사하는 지역민이 합세하여
                  일으킨 거사였다. 오산 농민과 시장에 나타난 장꾼, 학생과 천도교인들의 저항은 일제가 제암리 학살

                  만행을 일으키도록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생각된다. 오산장 시위는 발안장 시위와 함께 경기도 지
                  역 전체로 만세시위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오산에는 1908년에 설립된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농지에서 소작하는 농민이 많았다. 또한, 오산장
                  과 오산역 부근에 거주하는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깊었고, 조선농민들이 생존권에 위협받는 모든

                  원인은 이민족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은 지역농민들이 주도하였고 그
                  들의 연령은 동리나 집안에서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장년들이었다. 식민통치에 대한 이념적 반대보

                  다는 생존권 투쟁이 앞섰으며, 여기에 장날 모인 장꾼들이 가세하였다.
                    오산지역이 경부선 철로 연변에 위치하며 천도교, 기독교의 전파로 민중들의 역사 인식도 다른 지

                  역보다 선각적이었다고 보인다. 오산3·1독립만세운동으로 형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8명이었다.
                    1920년대 오산의 모습은 오산시장 내 싸전시장, 오산의 중심가에 2층 건물, 성호면 경찰과 주재소,

      오산시사        오산역 부근에 수원군 양잠 모범 부락, 오산우편소, 오산금융조합, 항아리공장, 유기전, 국수공장 등
                  과 시가지가 형성된 곳곳에 초가집들이 서 있었다. 당시의 수원군 성호면 오산리의 모습이다.

                    오산촌으로 불리던 동리가 오산장과 오산역을 중심으로 시가지로 발전하면서 오산리의 명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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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불리게 되었다. 성호면 면사무소는 한옥 기와 건물이었다.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로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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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하였는데, 그러한 역사적 상황과 함께 오산역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분매소가 각각 들어섰다.
                    1920년 8월 30일 설치된 동아일보 수원지구 오산분매소는 조선일보와 함께 1920년대 오산지역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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