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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묵살되자 상급기관인 경기도에 그 문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243
                    1928년 전통 유림의 지식인들도 주저앉지 않고, 무엇인가 민족과 전통문화를 위하여 움직여야 한                                         역사

                  다는 강박관념으로 신활자본 『화성궐리지』를 만들었다. 정조대왕이 오산화성궐리사를 설치하고 고종                                             /  유적
                  신미년에 오산화성궐리사를 증설한 이후 유생 차규범은 오산화성궐리사의 연혁과 역사를 정리하며

                  신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 유물
                    신간회운동이 일어나면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것도 성호면의 오산지회운동이었다. 오산지회는

                  한글강습을 오산공립보통학교 후원으로 개최하였고 기호소년정구대회, 오산씨름대회, 오산가극대
                  회, 척사대회를 열었다. 수원청년회 등은 간판은 달랐어도 그 주동 인물은 오산지역의 청년들과 민

                  족지도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비록 일본인들이 세운 일본인을 위한 학교보다 7년 늦게 설립되었
                  지만, 1913년에 학생 수 32명으로 시작한 성호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가 1929년에는 성호공

                  립보통학교의 학생 수는 438명이었고, 교사는 9명으로 발전하고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성장할 수 있
                  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원의 적색노조는 오산지역에 노동야학을 농민야학으로 바꾸면서 본격적
                  인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수원경찰서 형사대는 오산에 본부를 설치하여 수원과 오산일대에서 전개되

                  는 항일운동세력을 색출하고자 하였는데, 수원 청년동맹의 박승극, 공석정 등을 주모자로 보았다. 수
                  원에서 발생한 격문사건의 범인이 오산지역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수원서 형사대는 적색노조 청년동

                  맹 농조위원 등 간부를 체포하고자 수원, 오산, 평택, 서정리, 진위 일대의 사회 단체회관을 수색하였
                  다. 1930년대에 농촌진흥운동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마을의 이장(구장)을 이용하였다. 면장제도로서

                  오산지역의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오산지역은 동족마을로 자율적인 자치공동체 문화가 존재했고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집성촌의 전

                  통유제가 협동과 단결 향촌자치를 유지하였고, 오산리를 제외하고는 오산역과 오산장과 일정한 거리
                  를 두고 있었다. 면 중심으로 각 동리를 감시 감독할 수는 있으나 통제는 강하지 못했다. 성호면은 산

                  성면과 청호면에서 이름을 따왔지만 공동체적 성격은 깊지 않았다. 문시면, 산성면, 청호면, 어탄면,
                  초평면의 유제가 강하였고 그 아래로 집성촌이 14곳이 있었다. 각 동리 마을 중심의 생활권이 유지되

                  었으며 일제의 목표는 경제적 수탈에 있었다. 일본 농민의 이주가 있었으나 그들은 억압적인 지배력
                  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단지 동척의 농장과 같은 일본인 대지주의 농장의 경우 사음을 통해 간접지배

                  형식을 운용하였다.
                    1931년 2월 동아일보·조선일보 오산 분국 후원으로 수원청년동맹, 수원소년동맹 양감지부에서는

                  조선얼레공대회를 개최하였다. 음력 정초 농한기를 이용 청소년들에게 전통체육경기의 하나인 얼레
                  공대회를 개최하였다. 32개 팀 160여 명이 선수로 참가하고 구경꾼까지는 5백여 명이 모여 겨울 천

                  변에서 민족고유의 동절기 체육을 장려하였다. 장치기로 불리기도 하는 얼레공대회는 고려시대 성행
                  했다가 쇠퇴한 민속놀이로 양편 사람들이 각각 공채를 가지고 장치기공을 처서 상대편 구문에 넣음

                  으로서 승부를 다투는 경기다. 장치기 얼레공 외에도 봉회 공치기 등으로 불리는 타구놀이다. 전통문
                  화도 재현시키고 농촌 소년소녀들에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치게 한 근대 체육사에 새로운 장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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