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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다. 성호면의 면장 심세택이 동아일보·조선일보 오산지국 고문을 겸하고 있는 것은 당시 민
족운동이 활발하여지자 면장은 비록 일제의 통치기구에 소속되어 있으나, 민중세력과 연대하지 않으
면 자신의 직책을 유지할 수 없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성호면 광성학교 오산공립보통학교의 추계대
운동회는 학교운동회가 아니라 오산지역 전체의 공동체의식과 단결을 강조하는 축제이기도 하였다.
정월이면 구정을 맞아 동아일보지국에서는 오산역 앞에서 대대적인 척사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
다. 사회주의 청년단체는 노동야학 강습회를 통하여 농민, 노동자, 극빈자 자녀를 위한 야학을 1930
년대 끊임없이 개최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소작쟁의의 건수는 매년 배로 증가하여 수원 관내에만도 70여 건을 돌
파하였고, 빈손만 쥐게 된 소작인이 타작 끝에 자살하거나 구직하던 노동자가 노상에서 자기 몸에 자
해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1935년 일제는 농지령을 실시하였다. 실시 이후 35건의 소작쟁의가 증가하였다. 10여 년 고정된 땅
값을 일시에 10할을 올렸다. 추수기를 앞두고 수원지청에서 1,200건의 농지 지불명령장을 발부하였
다. 생산량의 7할을 내야 했던 고율 소작은 농민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빈민들은 구걸하는 걸인으로
바뀌었다. 더욱이 1936년, 1937년은 경제 불황으로 일반농촌의 생활상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이었으
며 곡물절도단이 발생하였다. 소작료가 3배 이상으로 인상되자 파종기를 앞두고 파산지경에 이른 농
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다.
1937년 일제는 육군기금을 위한 헌납을 강조했고 방공강습과 함께 국방헌금이 일반화되었다. 성호
면 사무소가 원인 불명의 화재로 전소된 사건은 당시 민심을 반영한다. 수원지청에는 지불명령장이
2,500여 건으로 예년에 비해 25% 증가했다.
1939년, 1940년이 되자 일제는 절미운동을 강화하였고 조선방공협회 오산지회 오산공립청년훈련
소를 성호면에 설치하여 청년들을 황군의 앞잡이로 내몰았다. 또한, 오산애부회 같은 친일단체를 만
들어 적성위문대를 만들게 했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와 신도 7명을 수원경찰서에서 체포하였
다. 수원지방의 빈궁민은 8,575호에 42,574명으로 집계되었다.
1941년 10월에는 수원군 성호면이 수원군 오산면으로 개칭되었다. 오산촌 오산리로 불리던 오산의
명칭이 그 본이름을 회복하였다.
오산지역의 인구증가로 인한 탓이다. 당시 일본인학교인 오산공립국민학교는 학생수가 82명으로
1906년 설립 당시와 동일하나 한국인 학교였던 성호공립국민학교는 1913년에 출발하였지만 1,284명
으로 학생 수는 열 배가 증가하였다.
오산시사 일제강점기 억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산지역 민족운동의 진원이 되는 힘은 열 배 이상 성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1942년 일제는 일본어 보급을 강요하고 상용어로 공포했으며, 오산면 20여 마을마다 총력연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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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직되었다. 초등학생들도 화학시간을 이용하여 교사 통솔하에 총동원 도토리 줍기를 실시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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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쟁의를 방지하기 위해 소작료 통제방침을 세웠다. 징병제가 실시되었으며, 농촌의 책무로 식량
공출을 강요하였다. 지주들에게도 생산책임의 수량 확보를 위한 목표달성궐기대회가 강요되었다.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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