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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 조직은 혁성단(革成團)이었다. 혁성단은 1926년 15명의 단원으로 오산에서 조직되었다. 혁성
단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혁성단 조직 직후 오산에서는 또 다른 사상단체인
‘오산사-ㄹ(살)청년동맹’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혁성단과 오산살청년동맹은 일정한 교유를 맺은 것
으로 보인다.
사회주의운동 단체로 조직된 ‘오산살청년동맹’은 성호면 오산리에 있던 갑자단(甲子團)과 초화청년
회(草華靑年會)가 1927년 초에 합동하여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김기선(金基宣)이 초기회장을 맡고
40여 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었다. 주요사업은 무산아동 교육기관인 대성학원(大成學院)의 운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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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오산살청년동맹은 조직 후에 바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는 못했다. 그것은 초기회장이었던
김기선이 사망하여 조직을 이끌어 갈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27년 후반기를 지나 본
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하면서 혁신을 꾀하였다. 오산살청년동맹은 대성학원의 운영과 대성학원 건립
자인 김기선씨에 대한 추도식 등을 중요과제로 추진하였다. 42)
오산살청년동맹은 1927년 10월 17일 총회를 열어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때 개선된 임원으로 위원
장에 공석정(孔錫政), 서무부에 한용록(韓用祿), 조사부에 이남수(李南壽), 박한실(朴漢實), 장봉운(張
鳳云), 운동부에 김용식(金容式), 교양부에 김지영(金知營) 등을 선출했다. 중요한 의결사항으로는 오
산청년운동의 선구자였던 김기선씨의 추도회를 10월 26일에 행할 것과 무산아동 교육기관이었던 대
성학원의 운영방안 등이었다. 그리고 이때 수원면에서 개최되는 신간회에 출석하기로 합의하고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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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실 씨를 선거하여 대표로 내보내기로 하였다. 이때 신간회수원지회에서도 10월 31일 월례회를
개최하여 고 김기선씨의 추도회에 김노적(金露積), 우성규(禹聖奎)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44)
오산살청년동맹이 주최한 오산청년운동의 선구자인 김기선의 추도회 행사는 계획보다 며칠 뒤인
11월 1일 오산예배당에서 유족과 동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당시 사회는 박건실(朴建實)이 보
았고, 신간회 본부에서 보내온 20여 통의 추도문이 낭독되고, 김노적·권태휘·우성규 등의 추도사
가 있은 뒤 행사가 끝났다. 45)
오산살청년동맹의 주력사업 중의 하나는 대성학원의 경영이었다. 대성학원은 1922년에 창립하여
무산아동을 교육하였다. 그런데 불의의 화재가 두 번이나 발생하여 경영이 어렵게 되자 오산살청년
동맹은 이를 회복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오산살청년동맹의 집행위원 일동은 ‘대성학원중건회’를 조
직하였다. 대성학원중건회에 참여한 사람은 김권배(金權培), 이남수, 심상무(沈相茂), 박규희(朴奎
喜), 최병찬(崔炳瓚), 공석정, 박한실 등이다. 그리고 운영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내 각지에 명함(名
啣)을 판매하여 그 이익으로 대성학원 건축비를 충당하고자 했다. 46)
오산시사
40) 『東亞日報』 1927년 1월 20일 .
제 41) 『東亞日報』 1927년 1월 20일 .
2 42) 『朝鮮日報』 1927년 10월 13일 .
권
43) 『朝鮮日報』 1927년 10월 19일 .
44) 『朝鮮日報』 1927년 11월 1일 .
45) 『朝鮮日報』 1927년 11월 4일 .
216 46) 『朝鮮日報』 1927년 1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