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4 - 제2권
P. 254

2. 경기지역 정치 활동과 오산


                    지리상 경기도가 서울과 연접해 있는 관계로 경기도의 정치활동은 중앙인 서울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후에는 미군정반이 설치되었다. 미군 측은 해방 이후에

                  도 일본인 도지사를 10월 2일까지 유임시켰다. 경기도 내무국 노무과장 신윤에게 도청 관리로 임명
                  될만한 자격을 갖춘 한국인의 명부 제출을 요구했다. 곧 일본인 관리는 여러 주 동안 고문 역할을 하

                  다가 해임되었다. 새로 임명된 신임관리들은 경기도 각 군의 인민위원회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일본의 군인, 경찰관, 행정관을 억류하고, 친일세력을 제거하면서 인민위

                  원회를 각 도에 결성하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한에서는 남조선과도입법위원 구성을 1946년 6월 29일 러치군정장관이 하

                  지중장에게 건의하며, 1946년 8월 24일 법령 제118호에 의해 창설되었다. 입법위원은 관선위원 45
                  명과 민선위원 45명 등 총 9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당시 경기도 대표로 민선위원으로 당선된 사람은

                  한민당의 하상훈(河尙勳), 양제박(梁濟博), 독립촉성국민회의 이진교(李珍校), 이종근(李琮根), 최명
                  환(崔鳴煥) 등 5명이었다. 그러나 민선위원 선거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반발에 따라 선거감시위

                  원의 조사결과 부정사실이 드러난 서울시, 강원도는 재선거를 실시하는 등 선거에 의한 정치출범은
                  초반부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광복 직후 경기지역은 여운형(呂運亨) 측의 좌익 성향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먼저 발족되었는데, 이
                  들은 지방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지방단위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특히 지방 업무는 인민위원회

                  가 군 업무까지 맡아 보고 있었는데 시흥, 고양, 수원, 평택, 포천 등이었으며, 시흥, 수원, 안성, 개
                  풍, 장단, 파주, 여주, 이천, 김포, 부천, 양주 등의 인민위원회는 군청 청사나 면사무소에서 주로 활

                  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1946년 중반에 이르면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당시 오산은 행정적으로 수원군에 속하였고, 1949년이 되면 화성군에 속하게

                  된다.
                    광복 이후 최초의 정치조직이었던 수원군 인민위원회는 조선공산당 수원군당이 중심이 되어 조직

                  되었으며, 군위원장은 일제침략기에 수원청년동맹위원장, 신간회 수원군 양감면 지회장으로 민족운
                  동을 하였던 박승극(朴勝極)이었다. 이들은 1946년 12월 23일 미군정 요인들까지 포함된 1,500여 명

                  을 초청해 인민위원회대표자회의를 수원에서 개최하며, 그 조직력을 과시하였으나, 1946년 민주주
                  의민족전선이 결성되자 흡수 통합되었다.

                    광복과 동시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수원군당은 결성 초기에는 소수에 불과했으나, 1947년 신민당
      오산시사
                  과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 수원군당으로 개편된 후 300명 정도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10월 대구사건의 여파로 일부 간부들은 피신하고, 일부는 좌익분자의 검거령에 의해 체포됐

      제           다. 그럼에도 1946년 12월 남로당 수원군당이 재건돼 유주목이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남로당은 1947
      2
      권           년 3월 22일 전국적인 총파업이 벌어지자 여기에도 동조하였다.
                    경기지역 우익성향 정치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수원지부가 결성되어 각

    254           읍면과 부락지회까지 조직을 정비해 국민운동화시켰고, 좌익을 타도한다는 명분하에 대한독립촉성
   249   250   251   252   253   254   255   256   257   258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