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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연맹(大韓獨立促成靑年聯盟) 수원군지부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전국학생연맹 수원지부도 255
결성되어 대공 투쟁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외에도 민족청년당 수원군단부, 대한독립청년당 수원군지 역사
부, 대한청년단 수원군단부, 수원군 소년체육회 등이 활동하기도 하였다. / 유적
해방 후 수원군 오산지역에는 이승만의 독립촉성회를 추종한 대한청년당 오산지단이 결성되었다.
수원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았던 임정출신이면서 광복군을 이끌었던 이범석의 민족청년단 훈련원이 · 유물
있었다.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은 이승만의 대한청년단과 맞서는 단체였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직업
이 없는 많은 젊은이들을 그들의 청년단체에 끌어들였다. 공산당 청년단체 조선민주청년동맹은 전국
적으로 큰 세력을 이루었고, 상해임시정부의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주청년동맹도 그 규모가 컸다. 그
런데 오산지역에서 활동한 청년단체는 대한청년단 오산지단이었다. 해방 후 첫 정치조직이었던 건국
준비위원회의 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수원을 포함한 오산지역은 건국
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가장 먼저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철도를 포함한 교통이 중앙정부인 미군
정과 가깝고, 경기지역의 수부로서의 중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의 영향속에서, 정치 참여
가 활발한 지역이었음에도 공산당이 장악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45년 11월에는 오산지역에 농민폭동사례가 있었다. 인민위원회 대표회의와 남로당의 5·10선
거 반대운동도 있었지만,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일본인이 떠난 빈자
리에 어업조합, 산림조합, 축산조합 등이 새롭게 발족되었다. 사회단체로는 ‘대한청년단’이 대세를
좌우했다.
1947년 남조선노동당(남노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정치세력은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하였으며, 남
로당 수원군당도 1948년 5·10 총선거 반대 투쟁의 방법으로 오산에서 투표함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남한 농업종사자는 인구의 7할 이상을 점유하였다. 농민 가운데 순수
자작농은 14%에 불과하였고, 자소작과 순소작으로 소작농이 83%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전체 농
지 가운데서도 자작지는 37%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63%는 소작지였다.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형
식적으로는 평등한 계약관계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한 지배와 예속의 관계였다. 인구의 다수가
예속적인 관계에 매여 있어서는 온전한 형태의 근대국가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에 제헌헌법은 “농
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라는 규정을 두어 농지개혁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정부가 수립되자 국
회는 법 제정에 착수하여 마침내 1950년 3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3월부터 5월 사
이에 분배 대상 농지의 70~80% 정도가 소작농에게 유상으로 분배되었다. 분배 조건은 분배 농지에
서 나오는 연간 소출량의 150%를 5년간 분할상환하는 것이었다. 단기간에 농지의 분배가 신속히 순
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개혁을 기정사실화하며 이미 1949년부터 농지를 분배할 준비
를 마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한의 농지개혁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농지개혁은
신생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 정치적 갈등의 핵심은 농지 문제
였고, 좌파 정치세력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을 주장하였다. 북한이 실시한 토지분배는
무상이기는 하나 소유권의 분배가 아니라 경작권의 분배에 불과하였다. 그 점에서 남한의 농지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