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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를 하며 오산여자중학교가 정착하게 되었다가 현 매홀중학교로 이전하고, 교명도 매홀중학교로 변
                  경되고, 현재는 성산초등학교 교정으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제2절    한국전쟁과 오산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은 공산주의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선전 포고도 없이 기습

                  남침한다. 북한 인민군은 최신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10개 사단을 동원하였으며, 그에 비해 대한민국
                  국군은 8개 사단이었다. 북한군은 모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세하였다. 북한군은 최신 소련제 T-34

                  탱크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한국군은 전차를 파괴할 아무런 무기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계획대로 북한군은 6월 28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미국의 태평양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한강 이남의 전황을 살펴보고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미국의 군사
                  지원을 워싱턴에 긴급 요청하였다. 북한군은 남침을 계속하여 7월 20일에는 대전을 함락한다. 7월

                  말경에는 낙동강까지 진출했으며, 3개월 만에 경상도 일부만을 남겨두고 남한의 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편 오산에서는 1950년 6월 30일에 전쟁 발발로 오산역사가 완전히 파괴되고, 7월 2일이 되면 미
                  제24사단 2연대 스미스 중령이 오산 죽미령 일대를 정찰한다. 수원~평택간 도로에는 국군 차량과

                  부대 이동이 진행되며, 7월 4일에는 국군 1사단 8연대가 용인 부근에서 오산으로 철수한다. 7월 5일
                  에는 오산 죽미령에서 미 제24사단 2연대 스미스부대가 한반도에 긴급 투입되어 오산 죽미령에서

                  전투를 벌이고, 이날 한국군은 갈곶리에서 한국군 제17연대가 죽미령을 돌파한 북한군과 격전을 펼
                  친다.





                  1. 오산죽미령전투


                    1950년 6월 28일 유엔의 신속한 한국지원결정에 따라 일본 도쿄의 미 극동군 총사령부가 워싱턴으

                  로부터 미 지상군 투입에 대한 법적 승인을 받은 것은 1950년 6월 30일이다. 한국 전선에 투입하게
                  된 주일 미 지상군은 제7사단, 제1기병사단, 제25사단, 제24사단 등이었는데, 그중 선견부대인 제24
                  사단 제2연대 1대대 병력을 부산으로 공수하고, 나머지 주력부대는 해상 기동으로 파한하게 되었다.

      오산시사        그리하여 1950년 7월 1일 부산으로 공수된 24사단의 스미스부대는 1950년 7월 2일 대전으로 북상하

                  여 안성 평택 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후속 주력부대의 내한을 기다리며 지연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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