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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산갈곶리전투
한국군의 오산전투 참여 상황은 황해도 웅진반도에서 철수한 한국군 제17연대가 스미스부대를 지
원할 임무를 띠고 오산으로 이동한다. 17연대는 LST와 민간어선을 이용하여 웅진반도에서 1950년 6
월 26일에서 27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인천으로 철수한다. 그러나 17연대의 피해는 적지 않아 113명
이 전사했고 371명이 부상했으며 64명이 실종됐다. 그리고 인천에 상륙한 부대는 많은 혼란을 겪게
되는데, 일부 병력은 트럭으로 영등포와 수원을 경유하여 대전에 집결했고 잔여 부대는 걸어서 혹은
열차 편으로 대전에 있는 본대와 합류하였다.
대전에 집결한 제17연대의 병력은 1,200여 명이었으며, 현지에서 2,500명의 신병을 보충받아 재편
성하였다. 편성을 마친 제17연대는 연대장 백인엽 대령의 지휘하에 하루의 전투훈련과 휴식을 가진
후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제17연대는 1950년 7월 2일 기차로 대전을 출발하여 평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보로 오산까지 전진할 예정이었다, 7월 3일 오전 17연대는 평택에서 아군에 수송
될 보급품의 하역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오후 3시쯤 호주 공군기의 편대가 나타
나더니, 이 화차를 폭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의 열차로 오판하여 오폭한 것이다. 이 오폭으로 평
택역은 사용할 수 없게 되고 평택 시내의 건물과 인명에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제17연대장 백인엽
대령도 부상을 당해 후송 조치되었다. 조종사가 한국의 지리에 어둡다보니까 일어난 조종사 과오였
다. 강력한 항의로 시정됐다. 이렇게 17연대는 싸우기도 전에 피해를 입는다.
국군 제17연대의 배치는 육군본부 및 제1군단 명령에 따른 것인데, 평택 서정리에서 8km를 북상하
여 오산 남쪽 1.5km 지점인 갈곶리 일대의 구릉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1950년 7월 4일 새벽 육군
본부는 한강 방어선이 무너져 국군 주력이 철수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제17연대를 새로 창설되
는 제1군단에 배속시킴과 동시에 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제17연대가 7월 4일 오전 5시쯤 이동을 개시하여 오산에 진지를 구축한 이날 오후 스미스 중령 일
행이 제17연대 지휘소로 와 연대장 직무대리인 김희준 중령에게 오산의 북쪽 죽미령에 한·미 양국
이 공동으로 병력을 배치할 것을 제의하였지만 병사들의 피로를 들어 반대하였다. 이처럼 한·미 양
국 부대가 남침하는 북한 인민군을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인접 지역에 배치되었으나 초기에 지휘 통
일의 결여로 각자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북한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1950년 7월 5일 오전 9시 북한 전차대가 죽미령에 포진한 스미스부대 진지를 통과해 오산으로 남
진을 계속해 제17연대 제1중대 진지 부근을 통과했다. 적 전차대가 나타나자 제1중대는 기관총과
2.36인치 로켓으로 공격했으나 꿈적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당해 제1소대장 이규환
오산시사
중위가 중상을 입고, 제2소대장 박만업 중위도 총상을 입었다. 이에 아군들은 연대 본부가 있는 갈곶
리로 철수하였다. 1950년 7월 5일 오전 11시쯤 북한군 전차대가 주진지인 갈곶리에 나타나자 연대는
제 즉각 81mm 박격포로 공격했지만, 포격에 놀란 선두 전차 4대가 갈곶교에 이르러 기관총을 난사해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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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다. 이에 전차공격 소대장으로 임명된 윤종환 중위는 각 중대에서 차출된 2.36인치 6문을 2문 1개 조
로 편성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적 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하자 능선 너머로 몸을 숨겼으나, 곧이어 적
262 전차서 발포한 포탄이 작렬하고 기관총탄이 날아왔다. 제9중대 지역에 있던 제3대대 중화기 중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