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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과 정화사업이 추진되었다. 오산역광장 포장, 잠업농가 438호를 상대로 양잠교육 실시, 금성전 267
기오산공장은 전국공장 중 새마을분임조경진대회에서 은상 수상도 하였으며, 대림제지공장이 누읍 역사
리에 세워졌다. 오산지역에 산업체가 증가하자 수원상공회의소 오산출장소가 개소되며 상공회의소 / 유적
역할이 증대되었다. 오산단위농업협동조합 지점과 연쇄점들이 속속 개소하였다. 오산청년회의소가
설립되었고, 독산성의 세마대 보수공사를 하였다. · 유물
오산의 도시와 농촌은 구별보다는 지역사회의 총체적 발전 속에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986년
화성군에는 영농마을 조성 운동이 추진되었다. 오산은 내삼미리를 전원시범마을로 육성하는 것을 시
작으로 저소득지역에 위치한 마을 12곳을 지정하여 농가주택개량사업을 벌였다. 농기계 보유주택 증
가로 벼베기가 20일 정도 단축되었으며, 상습가뭄지역에는 265개의 관정을 뚫었다. 산업체도 계속
유입되었는데, 대원특장공업주식회사가 세교리에 들어오며, 오산은 중소기업공단조성계획안도 발표
했다. 화성기업인협의회가 설립되며 오산지역의 산업화 추진이 계획성과 짜임새를 갖추며 진행되었
다. 오산읍이 농촌에서 도시화로 이어지며, 땅값도 따라서 오르기 시작하였다.
오산의 교통체계도 변화되었는데, 버스노선 미설치 지역 8곳에 버스노선이 개설되며 하루 29회씩
운행되고, 오산~송탄 간 9개 노선의 도로가 확장 포장되었다. 1987년이 되면 수도권복선전철이 착
공되고 1991년에 완공되었다. 이로 인해 수원, 병점, 오산, 평택의 교통이 원활해짐으로써 인구가 증
가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 시가지 형성으로 편입되는 신축건물이 늘어나면서 오산은 활기 있는
변화를 보이고, 88서울올림픽을 대비하여 국도 및 철도 주변의 불량주택을 보수하고 불량간판을 철
거하여 환경을 정비하는 시기도 이 시기였다.
농업부문에서 오산은 농촌지도자 영농후계자의 꿈을 가진 청년들이 농촌의 선진화에도 매진하는
변화를 보였다. 훗날 이러한 도농운동은 문화운동 측면으로도 영향을 끼쳐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원
동의 역말농악이 경기농악에서 종합우수상을 수상했고, 1986년 10월에는 제1회 화성군매홀문화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 오산읍민을 포함하여 많은 화성군민들이 참여하며 지방문화 활성화에 기여했다.
내무부는 경기도 내 6개 읍을 시로 승격시킨다는 발표를 하였는데, 1987년 11월 1일 화성군 동탄면
금곡리가 오산읍에 편입되어 은계리로 명칭이 고쳐지고, 평택군 진위면 일부가 오산읍으로 편입되었
다. 오산읍은 1989년 1월 1일에 시로 승격된다. 그리고 오산도시계획정비안이 확정 고시되었다. 이에
따라 1991년까지 자연녹지지역이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으로 바뀌고, 부산동 원동 일대에 폭 50m의
도로가 확장되었다. 원동 일대는 상업지역이 되고, 가수동 지역이 주거지역이 되었다. 원동에 하수도
복개공사, 배수공사가 개수 또는 보수되었다. 도시화 과정을 보면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한국토
지개발공사는 오산 수청동, 궐동의 자연녹지를 서민주택용지로 조성한다고 발표하며 궐동 일대를 택
지개발지구로 지정·고시한다. 경기지사와 주택공사는 궐동에 13평, 15평의 630가구의 임대아파트
를 준공했다. 오산원동지구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었고, 가수동에는 무주택서민을 위한 임대아파
트가 착공되었다. 도시화 과정 중에서도 새마을사업은 중단없이 추진되었다. 오산지역 새마을광역권
사업 559권이 추진되었다. 오산지역 새마을사업 불량환경 정비, 지붕개량, 도로포장, 하수구 정비 등
110건의 사업을 추진했다. 79개 마을에 마을 안길 포장, 마을진입로 포장, 대형관정 10여 곳 개발, 농